청우헌수필

영자의 불꽃 생애

이청산 2020. 8. 23. 12:20

영자의 불꽃 생애

 

지금부터 꼭 사십 년 전 영자는 갈래머리 고3 여학생이었고, 나는 담임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재미난 얘기도 제법 잘하는 유머러스한 사람이라지만, 선생님이 무어라 하면 뱅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수업 시간에는 이마 위 잔머리 곱게 날리며 작은 눈 반듯하게 뜨고 설명에 열심히 귀를 세우던 모습이 떠오른다.

국어과인 담임의 영향을 받기라도 한 건가. 졸업하면서 지역 대학의 국문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한 번쯤 만났던 기억이 나지만, 그 후로는 무심히 지냈다. 십수 년이 지난 어느 해 세밑에 연하장을 보내왔다. 나를 잊지 않고 있었던가 보았다. 얌전했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새해를 축복하고 건강을 기원하는 인사말 끝에 전화번호를 적어놓았다.

불혹에 가까운 중년 부인이 되어 있을 영자의 모습을 그리며 전화를 돌렸다. 목소리는 소녀티가 채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안부와 사는 모습을 서로 주고받는데, 아직 미혼이라 했다. 궁금했지만, 까닭을 물어보지는 못했다. 글눈 어두운 노년 아줌마들을 모아 한글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갈래머리 그 기억을 더듬으며 영자의 연하장이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써서 어느 문학지에 발표했다. 그 책을 영자에게 보내주었더니 감격스러워하는 답장을 보내며, 저들 곁에 오래오래 머물러 달라 했다. 그리고는 또 잊고 지냈다. 한 십 년쯤 흘렀을까.

내가 근무하는 곳을 수소문하여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솜씨를 모은 문집을 보내왔다. 학생들이라 해도 모두 나이 많은 사람들이고, 갓 한글을 깨친 사람들의 삐뚠 글씨와 서툰 문장으로 엮어낸 것이었다. 소곳한 미소를 짓게 했다.

학교의 내력에 관한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한 대학생이 글 모르는 아줌마 몇을 모아 어려움을 겪으며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영자가 찾아가 도와주면서부터 한글 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영자의 노력으로 학생 수도 점점 늘어나면서 주위의 도움을 받아 경주한글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다시 열었다고 한다.

이제는 시청의 보조금도 받아 가며 180여 명의 학생을 급별로 5개 반을 편성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영자가 교장이었다. 교사와 학생을 거느리기만 하는 교장이 아니라,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교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교장이다.

그 이태 뒤쯤 경주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영자를 만났다. 학교가 나날이 발전하여 이름도 경주행복학교라 바꾸고, 200여 명의 학생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한글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취미, 특기 활동도 하고 있다고 했다.

60~70세가 넘도록 한글과 숫자를 모르던 이들이 글을 읽고 쓰고, 은행 업무를 보고, 운전 면허증을 따고, 백일장 입상까지 하는 걸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 학생들의 공부 실적과 오롯한 꿈을 담은 패랭이꽃의 꿈이라는 책을 한 권 주었다. 매년 한 권씩 내는 책이라 했다.

참 좋은 일을 하고 있다며, 그런 일을 하자면 어려운 일이 왜 없겠느냐며, 그럴수록 보람도 크지 않겠느냐며 격려와 위안의 말을 해주고 헤어졌다. 세월이 무심히 흘러갔다. 그사이에 나는 현직에서 물러 나와 산과 강이 있는 한촌을 찾아와 조용히 살고 있다. 그 세월도 십 년이 되었다. 다른 제자들과 간혹 연락이 닿을 때 영자의 소식을 물으면, 결혼도 잊은 채 한글 학교를 열심히 운영 중이라고 했다. 잘하고 있겠거니 여기기만 했다.

내 글들이 웹 바다를 어떻게 떠다니고 있을까 싶어 가끔씩 둘러보는데, 어느 날 문득 이십여 년 전에 쓴 영자의 연하장이라는 글이 떠올랐다. 영자가 운영하는 학교의 여러 가지 사연을 담고 있는 블로그였다. 내 글을 여기에도 올려놓았구나, 계면쩍은 마음으로 사이트를 둘러보던 순간, 나도 모르게 비명이 솟구쳤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영자가 이태 전에 유명을 달리했다니?!

이순을 바라보게는 되었겠지만, 그 나이가 뭐 그리 많다고! 한창때 아닌가! 문득 잊고 지냈던 세월이 아리게 돌아보였다. 실장으로 모든 친구와 두루 친했던 영미에게 전화하여 영문을 물었다. 영자와 국문과를 같이 다니기도 한 영미는 글썽이는 목소리로 암과 투병하다 떠났다며 목이 멘다. 눈감기 얼마 전까지도 학생들과 함께했었다고 한다.

지역 매체에서는 영자의 외길 인생을 보도하며 안타깝게 기렸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사적인 일이든, 사회적인 일이든 다른 일에는 눈길을 일절 주지 않고, 오직 어르신들의 문해 교육, 평생교육, 사회적응 교육을 위해 혼신의 열정을 바쳐 왔다고 했다. 내가 그의 미혼을 걱정했던 그때만 아니라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갔다. 나에게 독신주의자는 아니라고 했으면서도, 학생들과 함께하기에 바빠 제 앞가림은 할 겨를이 없었던 건가.

지역사회 인사들도 영자의 이런 노력에 부응하여 경주행복학교를 아끼는 단체(경주행아단)’를 만들어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교육부, 시청, 언론기관 등 여러 사회단체에서도 그 공적을 기려 각종 상과 표창을 주었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영자를 감동하게 한 것은, ‘선생님은 우리들의 영웅이라며, 선생님한테 배우는 게 즐거워, 선생님이 보고 싶어, 선생님과 안고 싶어 찾아오신다는 어르신 학생이라 했다. 그런 학생을 맞이하고 가르치느라 아플 짬도 없었던가 보다. 그러던 어느 날 황망히 눈을 감았다. 마치 농촌계몽 운동에 온몸을 바치다가 최후에 이른 상록수의 채영신 같다고 할까.

많은 이들의 슬픔 속에 학교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운명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한글날 재학생을 비롯한 내빈, 학교 자문단, 후원단, 교사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문집 헌정식을 열었다고 한다. 그것으로 추모의 정을 어찌 다할 수 있으랴만, 그렇게 해서라도 간절한 마음을 담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거의 반평생 수필을 쓰며 살아왔다 하면서, 그를 먼저 보내고 실없는 글줄일지언정 저를 생각하는 글 한 줄 어찌 쓰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지 않고서는 안타깝고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힐 수 없을 것 같다.

지난 어느 날, 결석이라고는 모르던 영자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는데, 몹시 아파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다른 친구들에게 영자가 빨리 나아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빌어주자.’라고 한 나의 말을 영자가 나중에 전해 듣고 감동했다지만, 지금은 영자의 모든 생애를 내가 감동하고 있다.

영자는 불꽃 생애를 살다 갔다. 그 불꽃은 모든 것을 허망하게 태워버리는 소멸의 불꽃이 아니라,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희망의 불꽃, 이웃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랑의 불꽃이었다. 영자는 그 희망과 사랑으로 제가 이루고 싶은 일을 위해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다 바치는 생애를 살았던 것 같다. 더 큰 일을 못 이루고 가는 것을 아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다르다고 가만히 있을 영자가 아니다. 또 한세상을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더러 저들 곁에 오래 머물러 달라더니, 오히려 제가 먼저 가버렸다. 내가 저 있는 세상에 가면 작은 눈으로 빙긋이 짓던 옛적 그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시 만나면, 이제는 저 먼저 떠나지 말라고 충고 좀 해야겠다. 이런 글을 다시 쓰지 않도록 하라 해야겠다.

영자의 불꽃 생애는 많은 이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기려질 것이다. 영원토록 남을 것이다. 이승에 영원히 남은 저의 그 생애와 내가 결별할 날이 머잖아 올 것이다. 작별의 말을 무엇으로 해야 할까. 영자가 가 있는 세상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무엇을 하다 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운 영자-!(201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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