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배 268

나무의 견인

나무의 견인(堅忍) 내 일이든 남 일이든, 내 집 사는 모습이든 나라 돌아가는 모양새든, 큰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보고 듣고 겪다 보면 참아내기가 어려운 일들이 한둘 아니다. 어쩌면 일을 그렇게 하고 있는가. 사는 걸 이리 힘들게 하는가. 세상을 어찌 이 모양으로 만들고 있는가. 돌아보고 바라볼수록 견뎌내기가 힘든 일들이 적지 않다. 물신선이라도 되어야 할까. 따뜻하고 시원하게 대할 수 있는 일보다 참고 견디기가 어려운 일들이 더 끓고 있는 세상인 것 같기도 하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를 본다. 작은키나무 큰키나무, 곧은 나무 외틀어진 나무, 바늘잎나무 넓은잎나무, 늘푸른나무 갈잎나무……. 생긴 모양도 사는 모습도 다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한데 어울려 산다. 골짜기며 비탈에 살기도 하고, 등성이며..

청우헌수필 2020.09.23

영자의 불꽃 생애

영자의 불꽃 생애 지금부터 꼭 사십 년 전 영자는 갈래머리 고3 여학생이었고, 나는 담임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재미난 얘기도 제법 잘하는 유머러스한 사람이라지만, 선생님이 무어라 하면 뱅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수업 시간에는 이마 위 잔머리 곱게 날리며 작은 눈 반듯하게 뜨고 설명에 열심히 귀를 세우던 모습이 떠오른다. 국어과인 담임의 영향을 받기라도 한 건가. 졸업하면서 지역 대학의 국문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한 번쯤 만났던 기억이 나지만, 그 후로는 무심히 지냈다. 십수 년이 지난 어느 해 세밑에 연하장을 보내왔다. 나를 잊지 않고 있었던가 보았다. 얌전했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새해를 축복하고 건강을 기원하는 인사말 끝에 전화번호를 적어놓았다. 불혹에..

청우헌수필 2020.08.23

나무는 흐른다

나무는 흐른다 오늘도 일상의 산을 오른다. 지난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흠뻑 젖은 산에 강대나무 하나가 풀잎을 벗 삼아 쓰러져 누웠다. 강대나무는 싱그러웠던 몸통이며 줄기가 말라갈 때도, 흙을 이부자리처럼 깔며 쓰러질 때도 생애가 끝난 것은 아니다. 또 한 생의 시작일 뿐이다. 나무는 어느 날 한 알의 씨앗으로 세상을 만났다. 부는 바람 내리는 비가 강보처럼 흙을 덮어주었다. 뿌리가 나고 움이 돋았다. 파란 하늘이 보였다. 늘 안겨 바라보던 그리운 빛이었다. 제 태어난 고향 빛깔이었다. 바라고 바라도 그립기한 그 빛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해도 달도 뜨고 지고, 새도 구름도 날아가고 날아왔다. 그 빛을 향하는 마음이 시리도록 간절한 탓일까, 하늘 향해 뻗어 오르는 줄기 옆구리로 가지가 덧생겨 나고 ..

청우헌수필 2020.08.08

삶이 글이다

삶이 글이다 조 원장이 특강 한 번 해달라고 했다. 그는 시인으로 지역 문인협회의 회장을 물러나면서 지역 문학아카데미 원장을 맡아 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애를 써오고 있다. 나와는 지난 세월 속에서 친근한 직장 동료이기도 했고, 학교 동문이기도 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지역 문학의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말을 들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평생 거의 글을 껴안고 살아오긴 했지만, 아직도 자신 있는 글 한 편 옳게 못 써본 사람일뿐더러, 이 코로나 시국에 무슨 특강이냐며 손을 저었다. 글을 쓰고 있어도 글쓰기의 기본에 대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경륜을 숨기지 말고 좋은 일 좀 해달라 했다. 코로나는 적절히 대처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글쓰기의 기본은 무엇이며, 숨기고 있는 경..

청우헌수필 2020.07.23

아시나요 아름다운 시 외며 사는 행복을

몇 사람이 모여 시 낭송 모임을 만든 지 어느덧 십 년이 되었다. 그 세월 동안 수많은 시가 우리의 가슴에 안겨 저마다의 목소리를 타고 퍼져 나갔다. 좋은 시를 찾아 읽고 외면서 사는 일을 아름답게 만들어 보자며 한 일이었다. 회원들은 낭송 전문가인 회장님과 더불어 수시로 만나 연찬과 리허설을 거듭했다. 두 달에 한 번씩 하는 정기 낭송회, 한 해에 한 번씩 큰 무대를 얻어 여는 낭송 콘서트를 대비해서다. 낭송회와 콘서트는 거름 없이 잘 열어 왔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낭송은 어느덧 우리 삶의 한 부분이 되어 갔다. 시인이자 낭송가인 회장님은 여러 도서관이며 대학의 평생교육원에서 낭송 전문강사로, 낭송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오직 낭송예술을 더욱 떨쳐 보겠다는 일념으로 낭송 모임을 만드는 일에..

청우헌수필 2020.07.07

평안한 사람

평안한 사람 망팔쇠년도 성큼 넘어서고 보니 참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은 아무리 백세 시대라지만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엄청 더 많은 걸 보면서 오래 살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갈 날에 대한 상상의 양보다 살아온 날에 대한 기억의 양이 더욱 많게 느껴지는 것도 많이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다 그럴까. 살아온 지난날 속에는 희로애락의 온갖 기억들이 점철되어 있을 것이지만, 돌리고 돌려 떠올려봐도 나에게는 기쁘고 즐겁고 떳떳했던 일보다는 힘들고 괴롭고 부끄러운 일들에 대한 기억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지난 일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몸도 마음도 내려앉는 것 같아 무거워지기만 한다. 그때 그 일을 왜 그렇게 했을까, 그 사람을 왜 그렇게 대했을까, 그 순간 왜 그런 ..

청우헌수필 2020.06.24

산은 영원하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처럼 무성한 녹음으로 우거진 나무들을 넉넉한 품으로 안고 있다. 키가 크고 작은 나무, 몸통이 굵고 가는 나무, 잎이 넓고 좁은 나무……, 나무의 모양은 각양각색일지라도 모든 나무를 분별없이 너그럽게 품고 있다. 우거진 푸른 잎새들은 바뀌는 철을 따라 색색 물이 들었다가 마르고 떨어져 제 태어난 땅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가지들은 부지런한 생명 작용으로 떨어진 잎을 거름 삼아 새로운 잎과 꽃을 피워낼 것이다. 천명을 다한 나무는 강대나무가 되었다가 제 태어난 흙 위에 길게 몸을 누일 것이다. 세월이 흐른 후 떨어진 잎들이 그랬던 것처럼 흙이 되어 새 생명으로 태어날 것이다. 나무는 저들의 섭리를 따라 나고 지는 변전을 거듭한다. 이 나무들을 안고 있는 산은 철 따라 세월 따..

청우헌수필 2020.06.14

나무의 염치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날마다 오르는 산이지만 오를 때마다 설렌다. 나는 왜 산을 오르는가. 산이 있고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산의 품은 넉넉하고, 그 품속의 나무는 푼푼하다. 그 넉넉하고 푼푼한 품으로 드는 걸음이 어찌 설레지 않을까. 산은 품지 않는 것들이 없다. 어떤 것이 찾아와도 늘 품을 벌려준다. 내치는 법이 없다. 세상에 이보다 넓은 품이 있을까. 그 품을 사는 나문들 어찌 산과 마음을 따로 할 수 있을까. 산의 너그러운 기운을 받아 죽죽 뻗어나면서 어떤 것에게도 기다렸다는 듯 가슴을 내어준다. 산과 나무는 한 몸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런 산과 나무가 사는 산을 어찌 오르고 싶지 않으랴. 생기 차게 뻗쳐오르는 나무의 몸통이며, 푸른 잎 싱그러운 가지들을 보노라면, 몸속의 모든 혈관에 더욱 세찬 ..

청우헌수필 2020.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