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글 쓰는 병

이청산 2022. 9. 5. 14:24

글 쓰는 병

-이규보의 ‘詩癖’을 보며

 

  마을 사람들이나 아내의 눈에 비친 나는 종일을 한가롭게 빈둥거리다가 해거름이면 산에나 오르고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내나 남들처럼 땀 흘려 흙을 쪼거나 무얼 정성 들여 심거나 하는 일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번다했던 생의 한 막을 거두면서 이 한촌을 찾아올 때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어서였다. 텃밭 가꾸기는 흙을 좋아하는 아내의 몫으로 미루었다. 아내도 위하고 나도 위한다는 변명과 함께 그 신념(?)을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준수하고 있다. 

  그렇지만, 남들이 그리 보는 것처럼 마냥 시간만 탕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침 강둑을 거닐며 물이며 풀꽃, 해거름 산을 오르며 나무와 숲을 보면서 느꺼워해야 하고, 신문으로 뉴스로 세상 소식도 보고 들어야 하고, 읽고 싶은 것도 읽어야 하고, 글도 써야 하고…….

  하루하루 흘려보내는 시간 속에 빈틈은 별로 없다. 딴은 이리 분주스럽게 살고 있음에도 늘 빈둥거리는 사람으로 화인 찍히는 건 좀 억울하지만, 그 일에 대한 내 분망을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줄 이도 만만치 않아 민연할 때가 없지 않다.

  그 일들 속에서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글쓰기다. 어쩌다 내가 글과 연분을 짓게 되었는지, 글이 나를 찾아온 후로는 쓰든 안 쓰든 하루도 글 생각을 떠나 본 적이 없다. 쓸 때는 써서 생각하고, 못 쓸 때는 못 써서 생각한다.

  한동안 글을 안 쓰거나 못 쓰고 있으면 공연한 불안감이 무슨 해충처럼 내 속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것 같다. 그 ‘한동안’이라는 것이 조금 길어지기라도 할 양이면, 이러다간 영영 못 쓰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전율마저 느끼기도 한다. 

  누가 나를 글 안 쓴다고 윽박지르는 것도 아니다. 경향 지지紙誌들이 청탁을 빈번히 해오는 것도 아니다. 그리 널리 알아주는 내 문명文名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글을 안 쓰거나 못 쓰고 있으면 왜 그리 좌불안석하는 걸까.

  어쩌면 안 들어야 할 습벽이 든 까닭인지도, 안 걸려야 할 병에 걸린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 불안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어, 멀어지는 만큼 마음의 평안을 들이고 싶어 모니터 앞에 앉는다. 기억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시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시 쓰는 병[詩癖]’이라 하여 이를 시로 쓴 고려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떠오른다. 그 시에서 “한 번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이 병은 / 마침내 나를 이 모양 만들었네. / 낮이나 밤이나 심간을 도려내 / 몇 편의 시를 짜내고 있네.(一着不暫捨 使我至於斯 日月剝心肝 汁出幾篇詩)”라 했다.

  나도 이규보처럼 글을 향해 밤낮으로 심간을 도려내듯이 하지만, 나의 글은 그의 시처럼 한꺼번에 몇 편씩 써낼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달에 한 편을 쓸지언정 글을 잡고 있기는 나도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몇 마디, 몇 줄을 쓰든 못 쓰고 있을 때보다는 마음이 가볍다.

  그러다 보니 잠을 잘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머릿속에서는 늘 글을 쓰기도 지우기도 하고, 고치기도 다듬기도 한다. 강둑을 걷거나 해거름 산을 오를 때가 나에게는 생각을 정리하기에도, 글을 다듬기에도 거침새 없이 편안한 시간이 된다.

  그렇게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쓰고 애를 태운 끝에 나온 글은 어떤 글일까. 아침마다 보는 강물처럼 유려하게 흘러가는 걸림 없는 문장일까. 해거름마다 오르며 보는 넉넉한 산 같고 풋풋한 나무 같은 글일까.

  아니다. 무엇이 맺혀있어 돌부리 많은 길 같기도 하고, 길 못 찾아 헤매고 있는 미아의 겁먹은 눈길 같기도 하고, 무슨 맛인지 모를 풋과실 같기도 해서 누구에겐지 모를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딴은 공들여 썼다 하면서도, 이걸 글이라도 썼단 말인가 하고 돌아보는 내 모습이 너무나 작고 초라해 보여 헛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당대의 대문장가인 이규보마저도 이런 심정에 잠길 때가 있음에야 어쭙잖은 내 글이야 오죽할까.

  그는 ‘온몸에 기름이 마르고/ 이제는 살점마저 남아 있지 않을(滋膏與脂液 不復留膚肌)’ 만큼 고심한 끝에 쓴 시를 두고도 “그렇다고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 천추에 남길 만한 것도 되지 못하니 / 손바닥을 비비며 홀로 크게 웃다가 /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 본다,(亦無驚人語 足爲千載貽 撫掌自大笑 笑罷復吟之)”라 했다. 

  온 마음을 다 바쳐 쓴 시를 보니 하도 같지 않아 스스로 비소誹笑를 지으며 허탈에 빠지다가 그 웃음 그치고 나면 다시 시를 읊조리게 되니, 그야말로 ‘시 짓는 병’을 고질로 앓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수십 년 글을 써오면서 쓴 글을 다시 돌아보면, 마음을 가든히 다잡게 해주는 글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글을 쓰기 위해 밤낮을 두고 그리 앓아야 했던가. 그렇게 앓아도 이렇게밖에 쓸 수 없단 말인가.

  허탈하고 허전하여, 이제는 글을 쓰지 않으리라, 않으리라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모니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문득 놀라곤 하는 건 무슨 까닭인가. 나도 저 백운거사처럼 고치지 못할 병을 심히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 쓰는 병’이라 할까.

  도리가 없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어차피 병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법, 병을 대책 없이 내치려 할 것이 아니라 얼러 친하는 수밖에. 구슬려 옆에 두고 즐기는 수밖에.

  나를 한가로이 빈둥거리는 사람이 되게 하는 내 ‘글 쓰는 병’이여-.♣(2022.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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