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쓰러진 그리움

이청산 2022. 8. 14. 12:31

쓰러진 그리움

 

이  일  배

 

  “굽은 소나무가 있다. 속을 들여다보면 나이테가 수십 줄은 처져 있을 것 같은 이 나무의 굽은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라며 시작하는 나의 글이 있다. 삼 년 전에 썼던 「나무의 그리움」(『경북문단』 제36호)이라는 글이다. 

  그 나무는 뿌리 박은 땅에서 자라 올라가다가 무슨 까닭에선지 거의 직각이라 할 만한 굽이로 몸이 굽어져 버렸다. 굽어진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몸을 조금씩 들어 올리다가 다시 직각도 더 넘게 고개를 쳐들었다.

  하루 이틀에 그리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수많은 세월을 안고 그렇게 추슬러 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곧추서서 한참을 올라가다가 다시 앞쪽으로 조금 굽어졌지만, 다시 몸을 세워 바로 올라갔다. 오직 한곳을 바라면서-.

  다 커서 그렇게 굽어진 건지, 굽어지면서 그렇게 자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굽고 휘어지면서도 오직 향한 곳은 어디였을까. 하늘이었다. 제 태어난 하늘이었다. 씨를 주고 움을 주었던 하늘, 그 하늘을 애타게 그리면서 그렇게 안간힘을 다한 것이다.

  그걸 두고 나는 ‘나무의 그리움’이라 했다. 모든 나무는 하늘을 향하여 솟고 그 가지들을 뻗는다. 오직 하늘을 향해서만 산다. 그 소나무는 하늘을 바로 바라보기 어려운 몸이었기에 하늘이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하늘 향한 그리움이 더욱더 애절했을 것이다.

  그 나무가 쓰러졌다. 온몸이 땅으로 내려앉아 버렸다. 그리움이 주저앉아 버렸다. 이제 저 나무는 강대나무가 되어 땅속으로 들 것이다. 오직 하늘 향해 모든 열정을 살랐던 기억들을 안고 흙이 되어 갈 것이다. 언젠가는 그 하늘 다시 우러를 수 있을까.

  그 나무는 굽고 휘어진 몸을 하고서, 그럴수록 하늘이 더욱 그리워 지성을 바쳐 하늘 향해 솟구쳐 올랐지만, 다른 나무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잎 넓은 나무들의 그늘에 묻혀야 했다. 제가 하늘을 그리워하듯, 하늘 향해 오르려는 다른 것들을 또 어찌 탓할 수 있으랴.

  몸에 칠팔 할 이상의 볕을 받지 못하면 살아내기 어렵다는 소나무들의 속성을 전들 어찌 이겨낼 수 있었으랴. 잎이 말라 들더니 잔가지 큰 가지 마침내 둥치까지 말라 들어 뿌리조차 힘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속성이야 어떨지언정 그리운 하늘, 가린 하늘에 애간장이 더욱 녹아들었을지도 모른다. 하늘을, 하늘을 봐야 하는데, 그 그리운 모습을 눈에 담고 몸에 안아야 하는데 마음대로 볼 수 없고 닿을 수 없어 애를 태우다 몸조차 타들어 간 게 아닐까.

  딴 나무는 선 채로 강대나무가 되고서도 수십 년은 가는데, 왜 이리 쉬 쓰러지고 말았는가. 굽고 굽어지면서도 오직 하늘 향해 오르다 보니 한쪽으로만 쏠려 있는 제 몸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뿌리조차도 힘을 잃으니 이 마른 몸은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움 쪽으로만 향해 있던 몸이 쓰러졌다. 그리움밖에 모르던 육신이 쓰러졌다. 그리움이 쓰러졌다. 아니다. 그리움은 쓰러지지 않았다. 결코 지지 않았다. 저 마른 육신 속에 그리움은 송이송이 피어 있을 것이다.

  어느 시인은 “너의 허락도 없이 / 너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 주어버리고 / 너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 뺏겨버리고 / 그 마음을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 바람 부는 들판 끝에 서서 / 나는 오늘도 이렇게 슬퍼하고 있다 / 나무 되어 울고 있다”(나태주, 「나무」)고 했다.

  저 나무도 하늘의 허락도 없이, 하늘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주어버린 걸까. 하늘에게 거두어들이지 못할 마음을 너무 많이 뺏겨버린 걸까. 시인의 나무는 뺏겨버린 마음이 애달파 바람 부는 들판 끝에 서서 울고 있지만, 저 나무는 슬퍼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애간장이 다 녹아 재가 되듯 말라 들다가 그리움 모두 그러안은 채 저리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 저 나무가 가야 할 곳은 오직 흙이 되는 길뿐이다. 그 그리움 곱다시 안은 채로 부는 바람 내리는 비와 더불어 세월 속으로 흙 속으로 들어야 할 뿐이다. 

  저 나무는 제 태어난 흙, 언제나 그렇게 해 주었던 흙을 믿는다. 땅속으로 들어 흙에 섞여 흙이 되다가 어느 날 다시 새순, 새 얼굴로 세상에 나오게 될 날을, 흙이 그렇게 해줄 날을 믿는다. 그리하여 세상에 다시 나와 새 마음 새 그리움으로 새 하늘 향할 날을 믿는다.

  그날은 다시 하늘 향해 가슴 활짝 열고 전생에서 못다 푼 그리움을 다 풀 수가 있겠지. 올 올 한 올도 남김없이 다 사를 수가 있겠지. 저 나무는 쓰러진 채로 앙가슴을 보듬고 여미며 꿈을 꾸고 있다. 언젠가는 다시 필 그리움을 새기고 있다.

  쓰러진 그리움, 다시 태어날 그리움이다. 영원한 그리움이다. 새날 새 그리움을 향하여 날아오르는 그리움이다.

  이승의 마지막 손을 흔드노니 나무여, 쓰러진 그리움이여! 그 고운 꿈, 곱게 미쁘게 새겨 가기를-! ♣(202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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