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있는 그대로

이청산 2017. 2. 13. 11:10

있는 그대로

 

두 손주가 제 아비 어미와 함께 와서 설을 쇠고 갔다.

큰손주는 봄이 오면 초등학교 오학년에 올라간다고 제법 의젓한데, 일곱 살에 드는 작은손주는 마냥 개구쟁이다. 노래며 춤이며 갖은 재롱을 다 떨며 할아비 할미를 즐겁게 해준다.

귀엽고 사랑스럽기가 그야말로 눈에 다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한창 깡충거리며 재롱을 부리던 작은손주가 장난감을 하나 사 달란다. ‘그래, 사 주고말고!’ 아이들을 데리고 장난감점으로 갔다.

작은아이는 제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골라 덥석 안는데, 큰아이는 웃으며 보고만 있다. 뭐라도 하나 고르라 했더니, 나중에 필요한 게 있을 때 사 달라며 사양을 한다. 저 게 벌써 겸양을 부릴 줄 아는가.

철이 들어간다 싶어 큰아이가 대견스럽게 보였지만, 아이를 보내놓고 생각하니 억지로라도 무얼 하나 안겨 주지 않은 것이 짠하게 걸려오기도 했다. 제 마음을 감출 줄도 모르고 어린양을 피우는 작은아이도 사랑스럽고 귀엽다. 언제까지나 그 무구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를 바라고 싶기도 했다.

장자(莊子) 외편 재유(在宥)’조에 보면, 장자가 만든 우화적인 인물로 구름의 신()인 운장(雲將)과 천지의 기()인 홍몽(鴻蒙)이 등장한다. 다 늙은 노인이면서도 깡충거리며 놀기를 좋아하는 홍몽에게 운장이 기후의 정기를 화합시켜 여러 생물을 생육케 하려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으니, 홍장은 깡충깡충 뛰어놀기만 할 뿐 모른다고 한다.

삼 년 뒤에 다시 만난 홍몽에게 운장이 한마디만 가르침을 달라고 간청하자, 홍몽은, 자기 같은 이가 무얼 알겠느냐면서 당신의 마음을 수양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만물이 저절로 변화할 것이라고 했다. 운장은 비로소 깨달았다며 절을 하고 떠나갔다고 한다.

홍몽이 깡충거리며 노는 모습은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 모습을 보인 것이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본성을 자연 그대로 두라는 뜻일 것이다. 이 이야기도 장자가 늘 주장하는 무위자연을 말한 것이겠지만, 오늘날의 우리 삶을 다시 돌아보게도 한다.

이 찬란한 문화와 문명이며 지능도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의 시대에 무위자연이란 뜬금없는 관념유희라 할 이도 있겠지만, 이 시대가 과연 사람들을 점점 살기 좋게 하고, 문명이 발전하는 만큼 행복을 더해가고 있는지는 돌아 보일 때가 있다.

지금 사람들은, 사람이든 자연이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려 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바꾸려 하고, 고치려 하고, 꾸미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에 없던 것이 자꾸 생겨나게 되고 생겨난 것은 자꾸 진화하여 사람을 오히려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땅을 파고 산을 무너뜨려 지형을 바꾸고 거친 땅을 매끈히 덮어 기계가 굴러가기 좋게 만드는 데에 힘을 쏟고 있다. 그래서 풀과 나무는 계속 죽어가야 하고 짐승마저 제 자리를 얻지 못해 헤매기도 해야 한다.그 편리가 우리를 혹 삭막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을 가르치는 것도 인간의 본성을 잘 지켜나가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는 재주를 뛰어나게 만들어 남을 이기게 하는 데만 혈안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살기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다면 지금의 세상살이는 왜 이리 어렵고 어지러운가.

철이면 철따라 모양과 빛깔이 다른 풀꽃들이 어여쁘게 피어나는 흙길 강둑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차도 다니지 않는 그 강둑을 말끔히 덮어달라며 관에 청원을 하고 있다. 비 오면 땅이 질고, 길을 덮는 잡초 때문에 성가시다는 까닭에서다.

회반죽이나 토역청으로 덮어서 매끈해지고 나면 어여쁜 풀꽃을 보며 걷기보다 사람들은 행복해질까. 비가 내려도 땅이 질지 않으면 사람살이가 편안해지는 걸까. 어느 쪽이 더 행복하고 편안할까. 그 길이 풀 하나 자라지 못하는 메마른 땅이 될 걸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할아비가 사주려던 장난감을 굳이 사양하던 큰손주의 천연덕스러움이 사랑스럽고 예쁘다. 스스로 생각이 깊어져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이가 들면 그렇게 점잖고 의젓해져야 한다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가르침의 결과는 아닐까. 아이의 자연 마음이 무엇에 침노를 당한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을까. 조금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덜 깨쳐 있으면 그런 대로 두고 보면서 모든 것이 절로 변화하기를 기다려 보면 안 될까. 홍몽은 이름도 묻지 말고 실정도 엿보지 않아야 만물이 절로 생겨날 것이라 했다. 굳이 인위를 가하지 말라는 말이겠다.

이 무슨 시대에 맞지 않는 객쩍은 소리냐고 타박을 듣기 십상이지만,함초롬히 피던 풀꽃들이 다시는 그 모습을 부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강둑을 그려보면, 무위의 자연을 존중하던 옛사람의 말이 새삼스레 그리워지는 마음 또한 어찌할 수가 없다.

손주들은 저들 집으로 가서 잘들 놀고 있을까. 사양을 한다고 장난감 하나 쥐어주지 않던 할아비를 야속해 하지는 않을까. 안쓰러운 마음에 드는 기우라 믿고 싶지만, 그것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는 일이었다고 짠한 마음을 달래어도 되는 일일까.

어찌하였거나 아이들은 깡충거리며 놀던 그 마음을 내내 지닐 수 있으면 좋겠다. 누가 무어라 함이 없이 제 천품대로 자라고 살고 깨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동네 강둑길이 언제나 어여쁜 풀꽃이 만발한 길로 남았으면 좋겠다.절로 흐르는 세월 속에서 길도 풀꽃도 절로 제 모습을 바꾸어 갔으면 좋겠다.(2017.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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