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자연을 알게 해주소서

이청산 2020. 11. 23. 12:19

자연을 알게 해주소서

 

  책을 읽다가 보면, 눈길을 딱 멈춰 서게 하는 구절이 있다. 그런 구절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붙박고 싶게 한다. 그 구절이 주는 공감과 공명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읽을수록 편안해는 마음속에 계속 머물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알아주는 이를 만나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도 즐거운 일인가. 마음을 더없이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고맙고도 포근한 일인가. 사는 일이 어렵고 힘들다고 느껴질 때, 안아주기도 하고 밀어주기도 하는 이를 만난다면 얼마나 따뜻하고도 생기로운 일이 될까.

  어떤 책의 어느 한 구절은 바로 그런 사람을 만난 듯한 희열을 느끼게 하고 위안을 얻게도 한다. 그 구절을 어찌 떠나고 싶겠는가. 그 감동에서 깰까 싶어 어찌 다른 구절로 나가고 싶겠는가.

  어느 날 장자(莊子)를 읽다가 문득 그런 구절을 만났다. 모든 걸 멈추고 말았다. 더 나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나갈 수도 없었다. 눈길도 발길도 모두 그 자리에 들러붙는 듯했다.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한 그 구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한 번 몸을 받아 태어났으면 손상하지 않고 다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一受其成形 不亡以待盡, 莊子齊物論)”

  이 세상에 한 몸 태어났으면 다치지 말고 자연스레 살다 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다치게 하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살아왔는가. 아니다. 많이도 다치면서 살아왔다. 못 나서 다치기도 하고, 나서려다 다치기도 했다. 왜 난 대로 살지 못했던가. 무엇에 끌려 나서려 했던가. 그리하여 무엇을 얻었던가. 몸만 상하게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시진待盡이 아니라 자진自盡을 그려본 적도 있지 않았던가. 다음 구절들도 더욱 적나라하게 나를 비추고 있다.

  “사물과 서로 맞서고 마찰을 일으켜 뜀박질하듯 살아가면서 그 발길을 멈추지 못한다면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與物相刃相靡 其行進如馳 而莫之能止 不亦悲乎)”

  사람이 살다 보면, 사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찰이 어찌 없을까. 우리는 물건들, 물질들과 좀 많이 싸우며 살아가는가. 얻고, 지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용을 쓰는가. 사람하고는 또 어떤가. 이기고, 짓밟기 위해, 그것으로 명예와 승리를 누리기 위해 또 얼마나 혈투를 벌였던가. 그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뒤도 돌아볼 겨를없이 얼마나 숨 가쁘게 달려왔던가. 힘이 없어 그리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속은 그런 것에 매몰하지 않았던가.

  그런 게 본연이 아니라는 거다. 슬픈 일이라는 거다. 그런 삶이 결국은 몸을 상하게 하고, 자연의 삶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거다.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할 터인가. 알면서 그렇게 살고 있는가. 장자 님의 당연한 이 말씀이 가슴 깊은 곳을 새삼 찔러 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렇다. 난 애달프게 살고 있다.

  “평생을 발버둥 쳐오면서도 이루어 놓은 공은 없고, 고단하게 지치고서도 돌아갈 곳을 알지 못하니 애달프지 아니한가! (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 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 可不哀邪)”

  한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나를 거쳐 가거나 내가 잡으려고 애썼던 일도 많았지만, 이루어 놓은 게 무엇인가. 허무한 자취만 어지럽게 그려졌을 뿐, 이게 나를 위하고 이웃을 위한 나의 공이라며 내세울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지난날 나를 스쳐 간 명함으로, 지금 지니고 있는 울[] 한 칸으로, 이게 나라고 내세울 수 있는 건가. 사는 일이 참 겹고도 곤고하다. 그 간난을 덮을 수 있는 것으로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러고서도 돌아갈 곳은 오직 흙이며 바람일 뿐이지 않은가. 그래도 사람들은 나를 아직 살아 있다고 한다. 장자 님은 다시 준열하다.

  “사람들이 이를 일러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人謂之不死 奚益)”

  나는 지금까지 무엇으로 살아왔으며, 그렇게 살아온 내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걸 모르면서도 내가 살아 있단 말인가.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무슨 보탬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랬다. 살려고 그리 애쓰는 게 아니었다. 내가 집착해온 것들이 나를 잘 살게 해주는 게 아니었다. 그냥 살아야 했다. 풀꽃이 피고 지듯이 그냥 그렇게 살아야 했다. 저 풀꽃과 사람이 무엇이 다른가.

  나는 저들과 무언가 다를 거라는 착각 속에 살아오지는 않았던가. 그래서 저 풀꽃에는 없는 욕심들을 애써 품으려고 하지 않았던가. 장자 님은 이리하라는 계시의 말씀 한마디 없지만, 은근히 아프게 꾸짖고 있다. 그 임의 말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겉모습이 늙어감에 따라 그 마음도 따라서 늙어간다면 큰 슬픔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其形化 其心與之然 可不謂大哀乎)”

  풀꽃이 철을 따라 피고 시들고 마르고 종내는 제 난 자리로 돌아간다고 아려하는 걸 보았는가. 늙는 게 무엇인가. 어차피 모든 것은 흘러갔다가 흐른 것은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게 아니던가. 마음이 그 변천을 일일이 왜 따라가야 하는가. 도법자연道法自然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세상의 일희일비에 울고 웃는 한살이가 참 아둔하다. 맺는 말씀의 울림이 더욱 역력하다.

  “사람의 삶이란 이다지도 아둔한 것인가. 나만 홀로 아둔하고, 아둔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까.(人之生也 固若是芒乎 其我獨芒 而人亦有不芒者乎)”

  임이여! 당신이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아둔한 저를 일깨워주고 쓰다듬어주고 북돋우어 주기에 이 말씀 앞에 무한정 머물고 싶어지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몇 말씀만으로도 저에게는 한량없는 위안이요, 등불이요, 그 등불을 들고 나설 수 있는 용기입니다.

  임이여, 제가 섣불리 나서기 전에 조금만 더 곁에 머물면서 그 말씀의 참뜻을 한 번 더 헤아려 품게 해주소서. 그 무위를 살면서 자연을 알게 해주소서. 그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소서. 그래서 한 번 받은 몸을 다치지 않고 시진待盡하게 해주소서. 임이시여!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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