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자유의 자유

이청산 2015. 7. 31. 15:20

자유의 자유

 

동창에 부신 빛살이 잠을 깨운다. 일어나 창을 열면 새소리가 햇살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다. 맑은 아침빛에 씻긴 남창의 푸른 숲은 눈시울에 남아있는 잠결을 말끔히 걷어낸다.

산책길을 나선다. 내 하루의 시작이다. 고샅을 걸어 논두렁길을 따라 들판을 지르면 노거수 우거진 마을 숲이 나타난다. 숲의 삽상한 공기를 들이쉬며 체조를 한다. 팔다리를 흔들고 철봉을 당기고 기구를 돌리며 몸을 푼다.

강둑을 걷는다. 콘크리트 포장길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길섶에 함초롬히 피어있는 풀꽃이며 강물에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마음을 씻는다. 물바람이 상쾌하다. 포장길이 끝나고 온갖 풀들이 우거진 숲길을 걷는다. 마음도 푸름에 젖는다.

해거름 산을 오른다. 내 하루의 마무리다. 곧게 뻗은 나무, 굽고 휘어진 나무, 가느다란 가지, 굵고 큰 둥치, 나무들은 모두 제 살고 싶은 모습대로 서있다. 나도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다. 등을 굽혀도 걷고 허리를 곧추세워 걷기도 한다.

바람소리 새소리가 포근하고도 정겹게 감겨온다. 후다닥! 무언가가 숲을 재빠르게 스치는 소리, 고라니일지 너구리일지, 인기척을 채고 제 몸을 숨기는 소리다. 누가 저를 잡으려 했나. 만나면 손이라도 흔들어줄 텐데. 산을 내려와 마을로 들면 내 하루는 유쾌하게 저문다.

자유롭다. 무엇에도 메이지 않고,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내 하루가 자유롭다. 내 발로 걷고, 내 가슴으로 느끼고, 내 머리로 사유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날들이 참으로 자유롭다. 자유(自遊)의 자유(自由), 자유(自由)의 자유(自遊).

자연 속에 사는 날들이 아무리 자유롭다 해도 어찌 모든 날들을 물과 산, 풀과 나무와만 살 수 있으랴. 사람으로 살면서 사람 사는 세상을 어찌 모른 체하랴. 자연 속을 자유롭게 자유하다가 한 주에 한 번쯤은 세상을 만나러 간다. 세상 속의 아름다움을 찾아간다.

자연 속을 살다가 간혹 세상 속을 들려고 하면 걸리는 게 하나 있다. 내 발 내 몸에 의지해서만 세상을 드나들 수 없다는 것이다. 차를 몰고 휙 하니 달리면 될 터이지만, 나에게는 몰 수 있는 차도 없고, 몰 수도 없다. 한 번 세상을 드나들자면 차부를 바라며 한참을 걸어 나와 몇 번이나 차를 바꾸어 타고 달려야 한다.

열자(列子)처럼 바람을 타고 두둥실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힘 들여 걷는 불편이 없으니 얼마나 편리할까. 그러나 장자(莊子)는 이 또한 자유는 아니라 했다. 바람에 기대어 다니는 것이니 바람이 없으면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차라리 자유롭다. 내게 알맞추 있어주지는 않지만, 시각만 잘 맞추어주면 차는 늘 기쁘게 나를 태운다. 차가 올 시각을 기다릴 수 있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지만, 기다림도 삶의 긴요한 일이 아니던가. 기다려만 주면 내 갈 곳을 말없이 데려다 주니 이 또한 자유가 아닌가.

그보다 더 자유로운 게 있다. 차 안의 자유다. 차를 타고 갈 곳에 이를 때까지는 달리는 길을 따라 아무 걸림 없는 자유의 시간이 이어진다. 무상한 창밖 풍경에 취해도 좋고, 무엇을 읽어도 좋고, 명상에 잠겨도 좋고, 잠결을 유영해도 좋고, 멍하니 그냥 있어도 좋다. 누가 무어랄 수도, 무엇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내 온전한 자유의 시공이다.

차 안에서 내가 즐기는 게 또 하나 있다. 시를 외는 일이다. 조병화의 서로 그립다는 것은도 좋고, 정일근의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도 좋고, 겨울이면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도 좋다. 시 몇 편을 조용히 읊조리다 보면 언젠지도 모르게 목적지에 닿아간다. 달리는 차 안은 나에게 있어서 오붓한 휴식의 장이요, 오롯한 여유의 공간이다.

내 자유는 자연 속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타고 달리는 차 안도 내 자유(自由)와 자유(自遊)가 어우러지는 자연의 자리다. 차를 타고 달리는 시간이 즐겁다. 차를 몰지 않고, 몰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할까. 차를 몰고 다닌다면 이 자유를 어찌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시각에 맞추어 차를 기다리는 것도 시간에 메이는 것이 아니다. 자유를 위하여 시간을 유용하게 쓰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생광스런 일인가.

자유(自遊)로 자유(自由)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삶이 행복하다. 어쩌면 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세월에 이르기 위하여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지도 모르겠다. 백수를 바라보는 어느 노철학자는 인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육칠십 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행복이 무엇인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라 했다.

그 철학자처럼 행복이며 삶의 방도에 대해 잘 알 수는 없다고 해도, 오늘 내가 누리는 자유의 행복은 시간의 흐름이 가져다 준 것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이 흐름이 내 발걸음을 산이 있고 물이 있는 한촌에 이르게 했다. 윤슬과 풀꽃과 더불어 살게 했다. 세월이 가져다 준 행복이라 할까.

오늘 아침엔 무슨 풀꽃이 미소를 짓고 있을까, 가벼운 걸음으로 산책길을 나선다. 해거름이면 바람소리 새소리와 함께 나무들이 손짓하고 있는 산을 오를 것이다. 그리고 내일쯤은 차 안의 자유와 더불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내 삶의 날들과 함께 내 안에 있는 것, 나에게 닿아 있는 모든 것이 자유다. 무엇에도 기대지지 않고 메일 일도 없는 자유요 자연이다. 잘 지켜야겠다. 세월의 상큼한 이 열매들을 잘 보듬어 나가야겠다. 더욱 겸허한 마음으로 오는 세월을 맞이해야겠다. 이 자유의 자유를 위하여, 이 마음의 자유 천지를 위하여-.(2015.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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