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내 삶의 주인은

이청산 2022. 6. 12. 22:20

내 삶의 주인은

 

이  일  배

 

  차를 탄다. 내가 타기 편할 시각에 출발하는 차는 없어졌다. 내 편리와는 맞지 않는 차지만 기다려 탈 수밖에 없다. 차는 제 갈 길로 달려나간다. 내가 가고 싶은 길과는 상관이 없다.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차에 실려 가고 있다.

  차는 내 목적지에만 데려다주면 저의 할 일은 끝나는 거라고 여길 터이지만, 차가 당도하는 그 목적지라는 곳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다. 차가 정해 놓은 곳을 맞추어 내 목적지로 삼아야 한다. 차는 저의 목적지에 나를 내려놓을 뿐이다.

  멀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자면 외방을 달려온 차에서 내려 다시 동네로 오는 차를 갈아타야 한다. 차와 차 사이의 시간 틈을 나를 위하여 적절하게 조절해 주지는 않는다. 그 틈이 얼마이든 올 차를 간절히 기다렸다가 오면 기꺼이 탈 수밖에 없다. 

차를 타고 오고 가고 하는 시간들은 모두 내 삶의 시간들이다. 차를 탈 때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모든 시간들이 나의 시간이라 할 수 있지만, 진정 그것이 나의 것인가. 그 시간들이 내가 오라고 해서 오고 가라고 해서 가는 것들인가.

  아니다. 나와는 아무 관계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내가 그냥 담겨 있을 뿐이다. 내가 잡으려 한다고 잡히지도 않고, 보내버리려 해서 보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붙들고 싶을 때는 쉬 가버리고, 쫓아내고 싶을 때는 나를 모질게 잡고 있는 게 시간 아니던가.

  그 시간 속에 담겨 있는 내 삶인들 마음대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 태어나는 걸 내가 가려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죽음도 내 뜻을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졌을 뿐이고, 죽어질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닌가.

  내 마음인들 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는가. 희로애락이며 걱정, 한탄, 변덕, 고집과 같은 감정들을 다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가. 그것들은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 장자莊子도 ‘그 싹이 트는 곳을 알지 못한다. (而莫知其所萌, 莊子, 「齊物論」)’고 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없으면 그런 감정들을 나타낼 데가 없고, 그런 감정들이 없으면 내가 살아있을 수도 없으면서 그 감정들을 어찌 내 뜻대로 부릴 수가 없는가. 내 속에 있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진대, 나는 내 삶의 무엇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는가.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를 다시 본다. 맨살로 서 있던 가지에서 움이 트고 떡잎이 돋아 점점 커지면서 빛깔도 차츰 짙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무성한 녹음을 이룬다. 진녹색 잎은 때가 되면 누르고 붉은빛으로 변했다가 제 난 땅으로 돌아간다.

  저것들이 움으로 돋을 때 세상으로 나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라도 했을까. 짙푸른 빛깔로 피어날 날을 그리며 꿈에 부풀기라도 했을까. 다른 잎새들에 질세라 더 짙게 더 크게 피우기 위해 안간힘이라도 써보았을까. 푸른빛을 잃을 때가 올 것이라고 회한에 젖기라도 할까.

  나무는 그냥 나고 살고 질 뿐이다. 날 때가 되면 나고 커질 때가 되면 커진다. 짙어질 때가 되면 짙어지고 물들 때가 되면 물들고 질 때가 되면 진다. 그냥 살아도 때를 놓치는 법이 없고, 욕심내어 와락 커지거나 세상살이 힘들다고 우두둑 져버리지도 않는다.

  어쩌면 나무는 그런 욕심이며 변덕을 아예 모르거나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잊자 해서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살고 그저 질 뿐이다. 제 삶의 주인이 되기를 애쓸 일도 없지만, 주인이 안 될 일도 없다. 무엇의 노예가 될 일은 더더욱 없다.

  오늘도 차를 탄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시각이 오고, 내가 타야 할 차를 내가 탄다. 내가 탄 차가 가는 길이 나의 길이다. 내가 탈 차라 할 것도 없고, 그 길이 나의 길이라 할 것도 없다. 그냥 타고 가면 된다. 차가 멈추는 곳에 내리면 된다.

  내가 탄 차가 멈추는 곳이 나의 목적지이고, 내 발걸음이 머무는 곳이 나의 자리, 내 삶을 갈무리해야 할 자리다. 그 삶이 나에게 어떻게 오든 맞이하면 된다. 아늑하면 아늑한 대로 좀 힘들면 힘든 대로 그냥 맞으면 된다.

  기쁠 때는 그저 기뻐하고 슬플 때는 그저 슬퍼하면 된다. 분노가 끓을 때는 일순 분을 일으키기도 하겠지만, 시간에 씻어 보내면 된다. 정녕 외로울 때는 잠시 술잔을 기울일 수도 있지만, 외로움에도 술잔에도 빠지지 않으면 된다.

  애써 내 삶의 주인 노릇을 하려 애면글면할 일도 없고, 주인이 안 되려 내칠 일도 없다. 그냥 살면 내 삶은 곧 내 것이 되지 않으랴. 욕심내어 내 것으로 삼으려 할 일도 없고, 못 볼 것을 본 듯 물리치려 할 까닭도 없지 않은가.

  살다 보니, 내가 내 삶의 주인 노릇을 기꺼이 하고 싶은 삶도 없지는 않다. 요즘 일주일에 한 번 가방을 들고 나서는 나의 행로다. 그 발길이 머무는 곳에는 삶과 문학을 목 놓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따뜻한 삶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다.

  이 삶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내 심신이 나를 지켜줄 때까지, 나를 기다려주는 이들이 있을 때까지 사랑을 다하고 싶다. 아무런 욕심도 부담도 없이 그 길로 가는 차를 즐겁게 기다리고 싶다. 내 모든 삶을 그렇게 살고 싶다.

  나무가 살아가듯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202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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