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32

꿈이 가는 길

꿈이 가는 길 꿈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청운의 꿈, 그 희망이 솟고 활기가 넘치는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아니라도 봄날의 꽃잎 같고, 설한의 잉걸불같이 곱고도 따뜻한 꿈이라면 또 얼마나 생기로울까. 나이 탓일지, 몸의 기운 탓일지는 몰라도 요즈음 잠자리에 누웠다 하면 꿈이다. 눈만 감으면 몽롱한 꿈이 오래된 영사기의 낡은 필름처럼 어지럽게 돌아간다. 흘러간 세월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이거나 몸담았던 장소들이 스쳐 간다. 몇 조각 남은 영상들이다. 꿈에서 벗어나거나 잠을 깨고 나면 거의 지워지고 아련한 자취만 머릿속을 가를 뿐이다. 영상 속의 사람들은 거의가 서러운 사람들이거나 어려운 사람들이다. 만나서 서럽도록 애틋한 사람들인가 하면, 만나면 서로 힘들기만 한 사람들이다. 어머니의 글썽이는 ..

청우헌수필 2021.01.22

나무의 견인

나무의 견인(堅忍) 내 일이든 남 일이든, 내 집 사는 모습이든 나라 돌아가는 모양새든, 큰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보고 듣고 겪다 보면 참아내기가 어려운 일들이 한둘 아니다. 어쩌면 일을 그렇게 하고 있는가. 사는 걸 이리 힘들게 하는가. 세상을 어찌 이 모양으로 만들고 있는가. 돌아보고 바라볼수록 견뎌내기가 힘든 일들이 적지 않다. 물신선이라도 되어야 할까. 따뜻하고 시원하게 대할 수 있는 일보다 참고 견디기가 어려운 일들이 더 끓고 있는 세상인 것 같기도 하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를 본다. 작은키나무 큰키나무, 곧은 나무 외틀어진 나무, 바늘잎나무 넓은잎나무, 늘푸른나무 갈잎나무……. 생긴 모양도 사는 모습도 다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한데 어울려 산다. 골짜기며 비탈에 살기도 하고, 등성이며..

청우헌수필 2020.09.23

나무는 흐른다

나무는 흐른다 오늘도 일상의 산을 오른다. 지난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흠뻑 젖은 산에 강대나무 하나가 풀잎을 벗 삼아 쓰러져 누웠다. 강대나무는 싱그러웠던 몸통이며 줄기가 말라갈 때도, 흙을 이부자리처럼 깔며 쓰러질 때도 생애가 끝난 것은 아니다. 또 한 생의 시작일 뿐이다. 나무는 어느 날 한 알의 씨앗으로 세상을 만났다. 부는 바람 내리는 비가 강보처럼 흙을 덮어주었다. 뿌리가 나고 움이 돋았다. 파란 하늘이 보였다. 늘 안겨 바라보던 그리운 빛이었다. 제 태어난 고향 빛깔이었다. 바라고 바라도 그립기한 그 빛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해도 달도 뜨고 지고, 새도 구름도 날아가고 날아왔다. 그 빛을 향하는 마음이 시리도록 간절한 탓일까, 하늘 향해 뻗어 오르는 줄기 옆구리로 가지가 덧생겨 나고 ..

청우헌수필 2020.08.08

나무, 그대로 두자

나무, 그대로 두자 나무가 제 발로 산에서 내려올 리가 없다. 산은 나무의 태생 고향이요, 집이요, 보금자리요,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무가 들판에 내려앉아 있고, 길가에 나앉아 있고, 집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람 탓이다. 사람들이 산의 나무를 들어다가 저들이 일하는 들판에도 앉히고, 저들이 다니는 길가에도 앉히고, 저들이 사는 집 뜰에도 앉힌다. 사람들은 나무를 저들이 차지한 땅에 들이기를 좋아한다. 어느 때는 못 들여서 안달도 한다. 사람들은 나무에게 왜 그러는 것일까. 아껴주기 위해서인가. 치장을 위해서인가. 이득을 위해서인가.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그리하든, 어떻게 해주든 나무의 본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나무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무는 사람의 ..

청우헌수필 2019.10.13

나무는 겸허하다

나무는 겸허하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늘 그 자리에 서서 하늘 향해 푸른 가지를 뻗고 서 있는 나무들이 언제 봐도 아늑하고 청량하다. 잎사귀를 반짝이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나도 저를 향해 즐거운 손길을 보낸다. 강대나무가 된 소나무 하나가 넘어지면서 상수리나무에 기대어 서있다. 뿌리가 뽑힌 밑둥치를 힘주어 끌어당겨 마른 우듬지를 땅에 눕혔다. 다른 나무에 기대고 있던 저나 의지가 되어주어야 했던 나무나 모두 편안한 일이 될 것 같다. 이제 이 나무는 땅에 누운 채로 온갖 벌레며 미물들의 아늑한 집이 되다가 풍우에 몸이 녹으면서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무와 땅은 한 몸일지도 모른다. 땅의 기운으로 나고 자라다가 그 기운을 모두 다시 땅으로 가져가지 않는가. ‘나무는 인간의 자원이 아니라 ..

청우헌수필 2019.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