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산을 오른다. 하늘 향해 쭉쭉 뻗어 오른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나무되어 하늘로 오를 것 같다. 굽고 휘어진 나무들도 없지 않지만,어떤 모양으로 서있든 모든 가지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하늘이다. 가늘면 가는 대로 굵으면 굵은 대로 모두 하늘을 바라며 높고 푸르게 서 있다. 이 나무가 발을 딛고 서있는 곳은 어디인가. 물론 땅이다. 나무는 발을 아예 땅에다가 묻고 산다. 이렇게 사는 나무를 두고 ‘고착 생명’이라 한다. 아, 그런데 나무는 발로 먹고 사는가. 나무의 발이란 무엇인가. 뿌리가 아닌가. 땅 아래 깊숙이 딛고 서있는 그 발로, 그 뿌리로 수분이며 자양분을 빨아 들여 줄기를 통해 가지에게 잎에게 보내지 않는가. 뿌리가 대어주는 영양으로 줄기가 굵어지고 가지가 뻗고 잎이 솟는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생명 작용으로 보면 뿌리란 것은 분명 입이다. 뿌리에는 입만이 아니라 눈도 함께 붙어 있다고 봐야겠다. 캄캄한 지하에서도 먹을 것을 찾아 잘 뻗어나가는 것을 보면 예민한 감각을 가진 눈도 있을 것이다. 그 뿌리가 곧 나무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뿌리가 입이요 그 부위가 얼굴이라면 나무의 몸통은 어디일까. 밑동을 목으로 하여 뻗어 올라간 둥치며 줄기며 가지가 될 것이다. 그 중에 가지는 팔다리라고 할까. 그 팔다리 사이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그 열매며 꽃이란 또 무엇인가. 아리땁고 어여쁜 모습으로 보는 이들을 모두 즐겁게 하는 꽃은 그러한 제 자태를 드러내는 것 말고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꽃술에 꽃가루를 만들어 암수를 교합하게 하는 일이다. 제 스스로 못하면 바람이나 벌 나비의 힘을 빌릴지언정 그 교합으로 인하여 열매를 맺고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일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생식기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사람과 나무는 정반대로 사는 것 같다. 사람이 서있는 모습이 바르다면 나무는 위아래를 달리해 서있고, 나무가 제 모양으로 사는 것이라면 사람은 거꾸로 살고 있다. 사람이 드러내고 싶은 것을 나무는 묻고 살고 있고, 나무가 드날리고 싶은 것을 사람은 감추고 살고 있다.
시인들도 그 비밀을 알았다. “나무는 뿌리를 숨기는 수줍음이 있다/사람들이 낮에 성기를 숨기듯 말이다(이생진, 「나무뿌리」)”라는 시인도 있고, “옳거니!/ 그 빛깔 향기에 반하여/ 꺾고 만지고 냄새 맡았던 꽃/나도 그 꽃을 하나/ 몰래 감추고 있음을 알았다.(문병란, 「꽃의 생식기」)”라는 이도 있다. 나무는 어찌하여 사람과 드러내고 감추고 싶은 것을 달리하면서 위아래를 뒤집어 사는 것일까. ‘물구나무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어원에 대해서, 어느 국어학자가 “만주어에서 ‘신기루(蜃氣樓)가 서다’는 ‘melke e-(멀커 어-)’이며, ‘바다(海)’는 ‘namu(나무)’이다. 이 두 단어의 혼합 형태가 바로 ‘물구나무서다’를 탄생시킨 것으로 여겨진다.(강길운, 「국어의 轉義語와 死語의 연구」)”라 한 것이며,옛날에 죄인을 처벌하여 죽이는 것을 ‘물고(物故)낸다’고 하고, 그 죄인을 매다는 형목(刑木)을 ‘물고나무’라고 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보는 민간어원도 있지만, 수긍하기가 쉽지 않다.
국어사전을 보면, ‘물구나무서다’를 ‘손으로 바닥을 짚고 발로 땅을 차서 몸을 거꾸로 하여 서다.’ 혹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거꾸로 떨어지다.’로 풀이하고 있는데, ‘거꾸로’에 이 말의 뜻에 대한 방점을 찍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말에는 ‘나무처럼 거꾸로 서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닐까. 물론 사람의 처지에서 하는 말이겠지만. 어느 소설에서도 이러한 뜻을 비치는 대사가 보인다. 주인공이 나무가 되고자 하면서 “내가 물구나무 서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응,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한강, 「채식주의자」)라는 말을 하는 걸 보면 그렇다.
어찌하였거나 사람과 나무는 위아래를 서로 엇갈리게 산다는 말이겠다. 사람이 잘 사는 것일까, 나무가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나무는 얼굴을 묻고 사니 겸손하고 겸허한지도 모르겠다. 남을 시샘하거나 탐할 일 없이 오직 저의 팔다리만 싱싱하게 뻗어 올리면 된다. 그 사이에 꽃을 아름답게 피우고 열매를 충실하게 맺으면 된다. 그것으로 자신도 생기롭고 보는 이들의 마음도 아늑하게 할 수 있다. 사람은 얼굴을 묻으면 죽는다. 호흡이 막혀서도 죽지만, 드러내 보일 게 없어서도 못 산다. 사람살이란 치열한 얼굴 다툼일 수도 있지 않은가. 발과 다리가 땅을 의지해야 한다는 건, 디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히 각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나무는 생식기를 드러내어 예쁘게 꾸미고 살아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움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사람의 생식기는 부끄러운 것이다. 숨겨야 한다. 드러내거나 드러나게 하면 죄악이 된다. 아름다움을 누릴 때도 은밀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면서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드러내야 하는 걸까.
태초에 조물주가 만물을 생겨나게 할 때 얼굴을 한 곳에 묻고 평온히 사는 나무를 먼저 만들었을까. 얼굴을 쳐들고 발 디딜 땅을 찾아 헤매야 하는 사람을 먼저 만들었을까. 어느 것이 바르게 선 것이고, 어느 것이 거꾸로 선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삶일까. 다만, 애증도 희비도 다 넘어서서 넘볼 일도 탓할 일도 없이 사는 삶이 그리울 뿐이다. 오늘도 싱그러우면서도 말없이 서서, 아리따우면서도 조용히 꽃을 피우며 사는 나무를 보러 산을 오른다. 그 그리움을 찾아 오른다.♣(2019.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