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무의 살 자리

이청산 2019. 9. 15. 13:53

나무의 살 자리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 아늑하다. 산을 오르기 전까지의 어지럽고 성가셨던 일들이, 산에만 들면 맑은 물로 가셔낸 듯 말끔히 씻긴다. 산은 편안하다. 산이 편안한 게 아니라 산에 서 있는 나무들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해 보인다.

평평한 땅에 서 있든, 가파른 비탈에 서 있든, 등성이에 서 있든, 능선에 서 있든 모두 편안하다. 다들 제 타고난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서 있든 그들이 향하는 곳은 모두 하늘이다. 가풀막은 가풀막대로 평지는 평지대로 알맞추 뿌리를 박고, 제 생기고 싶은 모양대로 생겨나 서있고 싶은 모습대로 서있다.

나무는 날 땅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곳이든 나는 땅이 제가 날 땅이고, 사는 곳이 제가 살 땅이다. 그 땅에서 이웃 나무들과 어울리며 오순도순 살아간다. 함께 사는 나무가 떡갈나무든 괴불나무든 벚나무든 굴피나무든 가리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모여 사는 곳은 산이다.

차창을 스치는 거리의 가로수를 본다. 저 나무들은 필시 저곳에서 태어나지 않았을 터이다. 모두 저의 뜻과는 상관없이 심어졌을 것이다. 저 나무는 고요할 겨를이 없다. 소음과 매연을 한 시도 떠날 겨를이 없다. 도시 거리의 플라타너스는 매연 탓에 철 따라 마음대로 이울지도 못한다. 나무에게도 심신이 있다면 그 살이가 얼마나 고단할까.

뉘 집 앞뜰의 정원수를 본다. 잘 손질되어 어느 것은 앙증맞고 어느 것은 아담하다. 또 어느 것은 늘씬하다. 그것들은 아무리 잘 다듬어져 있을지라도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제 가지를 뻗고 싶은 만큼, 제 그리운 하늘을 향하고 싶은 만큼 향하며 살 수가 없지 않은가.

가로수와 정원수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까닭은 단 한 가지다. 제 살 자리가 아닌 곳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제 살 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얻지 못하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제가 살만한 곳에 편안히 다리를 뻗치고 누울 수 있을 때 얼마나 편안한가. 나무라고 다를까.

가로수와 정원수의 불행은 어디서 온 것인가.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나무들의 행복을 빼앗아 자신의 행복으로 삼으려는 탐욕 때문이다. 나무의 살 자리를 빼앗아 제 살 자리에 갖다 놓고 행복해하고 있다. 나무의 불행은 곧 인간에게 빼앗긴 행복의 빈자리에 들어앉은 괴물이다.

나무의 살 자리는 오직 산이다. 산의 나무는 편안하고 행복하다. 그러나 산의 나무가 마냥 행복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들은 호시탐탐 나무를 노린다. 무엇으로 쓰든 쓸만하다 싶으면 가차 없이 찍고 베어 넘긴다. 나무를 왜 하나의 생명체로 보지 못하는가.

나무는 난 자리가 죽을 자리고, 죽은 자리에서 다시 태어난다. 나무는 삶과 죽음이 따로 있지 않다. 나무는 뭇짐승들이며 미물들의 기꺼운 안식처가 되어주지만, 썩어가는 나무가 싱싱한 나무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체의 집이 되기도 한다. 그럴 겨를도 없이 나무를 무참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오직 사람일 뿐이다. 자원 가치만을 따라, 또는 개발을 빙자하여 얼마나 많은 나무의 목숨을 빼앗는가.

길가메시의 서사시에도 찬사가 실려 있다는 레바논 산악지대의 거대한 삼나무 숲은 대부분 사라지고 조그만 숲만 초라하게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지금도 아마존 열대우림은 무분별하게 벌채되면서 불타가고 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태양광 사업을 한답시며 산을 마구 깎아내고 있는 우리네 사정은 또 어떠한가. 이 땅에 나무가 없어진다면 사람인들 제대로 살 수 있을까.

이런 일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아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석유회사 관계자가 아마존 열대우림 원주민에게 숲을 없애면 석유 이권을 주겠다고 할 때, 촌장은 정글 역시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줍니다. 과일을 먹고, 수영하고, 좋은 공기를 마시는. 돈을 내지 않고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이 많은 즐거움은 가치가 없나요?”라며 단연코 거절했다고 한다. 리처드 파워스(Richard Powers 1957~ )는 무분별한 개벌(皆伐)에 반대하여 199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환경운동인 목재 전쟁을 소재로 하여 오버스토리(The Over Story)’라는 소설을 썼다. 이 속의 등장인물들은 나무에 자기 몸을 묶고 벌목꾼들에게 저항하고 있다. 그러다가 업무방해죄로 재판까지 받게 된다.

나는 나무에게 할 말이 없다. 동네 뒷산의 나무들이 산판꾼들에 의해 무참한 죽임을 당할 때도, 동네 강둑의 노거수들이 제방보강공사에 밀려 사정없이 베어져 넘어갈 때도 나는 나무에 몸을 묶지 못했고, 재판받을 일도 못 했다. 그 삶의 자리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 무력감과 자괴감에 마음이 아리고도 무겁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가로수의 가지를 치지 않는다고 한다. 마른 가지만 잘라준다고 한다. 나무가 날 적에서부터 이어지는 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 나라 가로수는 불행 중 다행이다. 우리의 봄날 가로수는 어떠한가. 사지가 처참하게 잘린 참혹한 모습을 흔히 보지 않는가. 우리는 그런 사랑을 왜 못하는가.

이어령은 생명이 자본이다.’라는 책에서 묘목을 심어 잘 자란 남이섬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영화의 배경도 되면서 수많은 관광객을 모아 자본이 되고 있다고 했다. 나무의 인간에 대한 이바지는 생광스럽지만, 나무는 인간의 자본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무는 나무로 태어나고 살아갈 뿐이다. 사람 하나하나가 귀한 생명이듯 아까시나무도, 노린재나무도 모두 귀한 목숨들이다. 사람의 제 살 자리를 누가 마음대로 넘볼 수 있는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누가 멋대로 헤칠 수 있는가. 나문들 어찌 그리할 수 있는가.

나무처럼 나고 살고 싶다. 제 날 자리, 제 살 자리에서 삶도 죽음도 따로 없는 삶을 살고 싶다. 사람아, 나무를 제 자리에 살게 두자. 제가 살고 싶은 곳에서 제가 살고 싶은 대로 살도록 하자. 그건 나무의 소망만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소망은 어떠한가. (20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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