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화 11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삼월, 마침내 봄이 온다. 냉기 가득한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해 나온 것 같다. 아직 완전히 통과한 것은 아니다.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달려가면 따스한 햇살이며 맑고 푸른 하늘이 나타날 것이다. 그 터널의 출구를 제일 먼저 틔운 것은 상사화 잎 움이다. 찬 바람 불고 눈발도 날려 아직도 겨울이 제 품새을 지키려 간힘을 쓰고 있는 어느 날 그 냉기를 뚫고 꽁꽁 움츠리고 있던 알뿌리에서 움을 밀어냈다. 저 움이 자라 치렁한 잎을 피워내다가 여름 들머리에서 잎을 다 거두고 꽃대를 밀어 올릴 것이다. 봄 하늘을 가장 먼저 연 사람은 마을 농군 정태 씨다. 올해부터 벼농사를 거두고 사과 농사를 지어볼 참이라며 굴착기를 동원하여 너른 논들을 파기 시작했다. 서너 자 깊..

청우헌수필 2023.03.26

기다림에 대하며(5)

기다림에 대하며(5) 작은 기다림만 있으면 된다. 창창한 포부며, 우렁찬 이상이며, 풋풋한 희망이며, 달금한 꿈 들은 없어도 된다. 그런 것들이 새삼스레 찾아와 주지도 않겠지만, 찾아와 준대도 가볍잖은 짐이 될 것 같다. 해넘이 저녁 빛이 곱다. 저 해 저리 고운 빛을 뿌리기까지는 붉고도 푸른 꿈을 안고 지상으로 솟아올라 세상을 서서히 비추어 나가다가, 드디어 하늘 한가운데 이르러 모든 세상을 다 안아 보기도 하며 환호를 터뜨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 환희에 작약하고 있으려고만 하지 않았다. 넘어갈 줄도 알고, 질 줄도 아는 품새가 저 고운 빛을 그려 냈을지도 모른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저 해는 제가 만든 고운 빛 속으로 자태 곱게 들것이다. 홀가분해서 좋다. 한창때는 무거운 짐도 무거운 줄 모르고 지..

청우헌수필 2023.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