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화 15

기다림에 대하여(7)

기다림에 대하여(7) 내가 왜 이리 상사화에 빠졌는지 모르겠다. 산수 좋은 곳이라고 찾아와 마을에 발을 내리고 살던 어느 날, 마을 숲에서 만났다. 애절한 그리움을 지닌 꽃이란 걸 알았다. 내게도 맺혀 있던 무슨 그리움이 있었던지, 그 후로 상사화 꽃밭은 내 정서의 샘이 되고, 내 삶의 한 의지처가 되기도 했다. 비가 내리든 바람이 불든 그 꽃을 찾지 않는 날이 없었다. 상사화는 잎과 꽃이 서로 그리며 돋아나고 피어나다가 말라가고 잦아드는 꽃이라지만, 나는 상사화를 보며 피어나고 잦아든다. 눈이 채 녹기도 전인 2월 하순께 어느 날 마을 숲에 들다 보면 문득 땅속에서 뾰족한 순이 솟는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순은 잎이 되어 자라난다. 봄을 지나 5월을 넘어서기까지 난초처럼 길쭉하고 치렁한 잎을 돋우어 ..

카테고리 없음 2025.08.27

이 상처를 어찌할까

이 상처를 어찌할까 살다 보면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 적지 않다. 사는 일이란 상처의 극복 과정이라 할까. 그 상처를 잘 극복하지 못하면, 삶이 어렵거나 심지어는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다. 요즈음 나는, 남이 알면 비소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되는 일로 칼끝이 찔러오는 듯한 아픔을 겪고 있다.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이 마을에 발을 내리고 산 지도 어언 십수 년이 지나가고 있다. 내가 마을에서 아름답게 여기는 정경 중 하나가 마을 숲 가장자리 한 곳에 다소곳이 피고 있는 상사화 꽃밭이다. 누가 오래전 몇 포기 심은 것이 점점 벌어 칠팔 월 한여름쯤에는 화사한 홍자 빛 꽃밭을 이룬다. 상사화는 여러해살이 알뿌리 화초로 이른 봄에 움이 터 5, 6월까지 난초 같은 치렁..

청우헌수필 2025.08.13

박탈당한 그리움

박탈당한 그리움 오늘도 마을 공원 숲속으로 든다. 산책길에 늘 거쳐 가는 곳이다. 소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회나무 노거수가 우거진 숲속 한가운데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당이 있고, 그 옆에는 상사화가 모여 꽃을 피우는 곳이 있다. 아주 오래전 마을 어느 부인네가 어디에서 몇 뿌리 가져와 옮겨 심은 것이라 한다. 그 꽃이 간직하고 있는 사연을 알고서 심은 것일까. 상사화는 알뿌리에서 순이 돋고 잎이 난다. 잎은 비늘줄기에 나 긴 타원형으로 치렁하게 자라다가 오뉴월 무렵부터는 조금씩 말라 든다. 칠월이 되면 완전히 마르고 삭아서 땅속으로 스며들 듯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꽃대가 솟는다. 꽃대는 솟으면서 끝자락에 꽃을 품다가 마침내 몇 갈래로 홍자색 꽃을 아리따이 피워낸다. 꽃 진 꽃대 끝에 ..

청우헌수필 2025.07.16

혼자서도 잘 사는 법

혼자서도 잘 사는 법 마을 들머리 숲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며 참나무 회나무 느티나무 들이 우거져 있고, 그 한가운데쯤에 정월 대보름 새벽이면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당이 있고 그 옆에 상사화밭이 있다. 해마다 유월, 구월이면 마을 사람들 모두 나와 풀베기를 하지만, 풀은 또 어느새 우거진다. 상사화는 모든 것이 아직 얼어 있는 이월 말이면 움트기 시작하여 곧 촉을 내민다. 봄이 오는가 싶으면 난초 같은 긴 잎들을 돋워낸다. 봄 지나 오뉴월에 이르기까지 무럭무럭 자란다. 상사화만 자라는 게 아니다. 주변의 풀들도 상사화보다 더 크게 솟는다. 풀이 상사화가 잠길 만큼 짙어진다. 상사화 잎은 짙어지다가 유월 중순부터는 마르기 시작한다. 칠월 넘어서면 마른 잎은 땅에 붙어버리고 꽃대가 솟아 8월에 이르면 홍자..

청우헌수필 2025.06.08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삼월, 마침내 봄이 온다. 냉기 가득한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해 나온 것 같다. 아직 완전히 통과한 것은 아니다.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달려가면 따스한 햇살이며 맑고 푸른 하늘이 나타날 것이다. 그 터널의 출구를 제일 먼저 틔운 것은 상사화 잎 움이다. 찬 바람 불고 눈발도 날려 아직도 겨울이 제 품새을 지키려 간힘을 쓰고 있는 어느 날 그 냉기를 뚫고 꽁꽁 움츠리고 있던 알뿌리에서 움을 밀어냈다. 저 움이 자라 치렁한 잎을 피워내다가 여름 들머리에서 잎을 다 거두고 꽃대를 밀어 올릴 것이다. 봄 하늘을 가장 먼저 연 사람은 마을 농군 정태 씨다. 올해부터 벼농사를 거두고 사과 농사를 지어볼 참이라며 굴착기를 동원하여 너른 논들을 파기 시작했다. 서너 자 깊..

청우헌수필 2023.03.26

기다림에 대하며(5)

기다림에 대하며(5) 작은 기다림만 있으면 된다. 창창한 포부며, 우렁찬 이상이며, 풋풋한 희망이며, 달금한 꿈 들은 없어도 된다. 그런 것들이 새삼스레 찾아와 주지도 않겠지만, 찾아와 준대도 가볍잖은 짐이 될 것 같다. 해넘이 저녁 빛이 곱다. 저 해 저리 고운 빛을 뿌리기까지는 붉고도 푸른 꿈을 안고 지상으로 솟아올라 세상을 서서히 비추어 나가다가, 드디어 하늘 한가운데 이르러 모든 세상을 다 안아 보기도 하며 환호를 터뜨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 환희에 작약하고 있으려고만 하지 않았다. 넘어갈 줄도 알고, 질 줄도 아는 품새가 저 고운 빛을 그려 냈을지도 모른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저 해는 제가 만든 고운 빛 속으로 자태 곱게 들것이다. 홀가분해서 좋다. 한창때는 무거운 짐도 무거운 줄 모르고 지..

청우헌수필 2023.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