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그리움의 힘

이청산 2023. 1. 10. 14:34

그리움의 힘

 

  고사목이 된 긴 소나무 하나가 누워 있다. 큰 소나무가 아니라 긴 소나무다. 길이가 네댓 길은 족히 넘을 것 같다. 굵기는 가장 밑동 부분의 지름이 고작 한 손아귀를 조금 넘어서고, 꼭대기 부분은 엄지손가락 굵기에 불과하다. 이 나무는 살아생전에 굵기는 별로 돌보지 않고 키만 죽을힘을 다해 키우려 했던 것 같다. 가지도 별로 없다.

  주위에는 큰 나무들이 늠름히 서 있다. 아마도 이 나무는 큰 나무가 떨어뜨린 씨앗에서 생명을 얻어 움이 트고 싹이 솟아 나무의 모습을 이루어간 것 같다. 대부분 나무는 바람이나 무엇의 힘을 빌리더라도 자신의 종자를 멀리 보내기 위해 애를 쓴다. 어미의 발치에 나서 어미와 서로 빛과 양분을 다투어야 하는 몹쓸 짓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씨앗은 불행히(?)도 어미의 그늘에 떨어진 모양이다. 씨앗이란 어디에 떨어지든 일단 흙에 닿으면 제 혼자 나고 자라고 살아야 한다. 씨앗 속에는 부모에게서 받은 삶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것으로 제 삶을 오로지 이루어가야 한다. 부모가 더는 돌봐줄 일도, 돌봐주기를 바랄 일도 없다. 나무를 비롯한 모든 푸나무의 숙명이요, 운명이다.

  나무는 뿌리에 흙과 물이 있고 가지에 햇빛과 바람이 와 닿기만 하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고 돌봐주지 않아도 잘 자라고, 잘 살아간다. 인간이며 뭇 동물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너끈히 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무에게 삶과 그 방도에 대한 고뇌가 없는 건 아니다. 나무에게도 애타게 바라는 일이 있고, 사무치는 그리움도 있다.

  어차피 뿌리 박은 땅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간다 하지만, 나무에게도 개척해 나가야 할 운명이 있다. 하늘을 찾아가야 한다. 해를 쫓아야 한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늘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해를 품고 있는 하늘은 나무의 간절한 명줄이고, 그리운 고향이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본향이다.

  어미의 발치에 떨어진 씨앗은 내리는 비와 바람을 타고 흙 속으로 들었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는 어느 봄날 흙이며 마른 잎을 헤치고 땅 위로 움을 틔웠다. 어미에게서 받은 기운이며 땅과 물이 주는 자양으로 줄기를 솟구쳐내고 잎눈을 하나씩 틔워갔다. 조금씩 자라는 사이에 계절이 흘러가고, 흐르는 계절에 따라 제 몸피도 조금씩 불어났다.

  제 몸만 자라는 게 아니다. 주위의 큰 나무들도 가지가 늘어나고 잎도 커지고 있다. 점점 무성해지면서 그늘이 늘어가고 짙어진다. 저들이 짙어갈수록 하늘이 아득해져 가는 것 같다. 나무는 모두 하늘을 향해 태어나고, 하늘을 바라며 살아가야 한다. 경배하는 나의 하늘은 어디로 가는가.

  소나무는 전나무나 주목처럼 그늘에서도 잘 견디는 음수(陰樹)가 아니라, 자작나무나 사시나무처럼 햇빛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양수(陽樹)의 천성으로 태어난다. 천성은 그렇다 하더라도 하늘이 없으면 식량은 어디서 얻어야 하는가. 빛을 내려받아 뿌리에서 올라오는 물과 섞어 밥을 만들어야 하거늘, 하늘을 다 빼앗기면 어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이 그립다. 내 하늘을 찾아가야 한다. 생존에 대한 몸부림이요, 천성에 대한 그리움이다. 내 하늘을 앗아간 저 큰 나무들이 원망스럽다. 아니다. 그 그리움은 나의 것만이 아니다. 저들 모두 그 천성과 생존의 그리움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나의 경쟁 상대는 오직 나일 뿐이다. 나의 하늘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움을 찾아가야 한다.

  내 하늘을 열려면 하늘로 내가 다가가야 한다. 내 하늘은 내가 열어야 한다. 큰 나무가 가지 사이에 남겨놓은 틈으로, 큰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려 잠시 빛살이 드는 사이로 발꿈치를 돋우기도 하고, 허공을 향해 팔을 내쳐 뻗기도 하고, 목을 한껏 뽑아 올려 하늘을 향하기도 했다. 그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옆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이리저리 수족을 뻗쳐 낼 여가도 없이 오직 하늘만을 향했다. 이만하면 내 하늘을 찾을 수 있을까. 이리 오르면 남부럽지 않은 하늘을 열 수 있을까. 그러다 보니 몸을 살찌울 여력도 갖지 못하고 키만 뽑아 올렸다. 그리하여 그 하늘이 주는 빛살을 조금씩 받을 수 있었지만, 그래서 키라도 세울 수 있었지만…….

  그리 애절하게 하늘을 치달아도 큰 나무를 넘어설 수가 없다. 큰 나무 틈으로 드는 가녀린 빛살만으로는 숨을 쉬기가 벅차다. 그래도 삶을 놓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몸이 조여왔다. 달과 해가 바뀌기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말라 들었다. 빛이 제 몸의 칠팔 할쯤은 감싸 주어야 숨 제대로 쉴 수 있음을 숨이 넘어갈 때쯤에야 천성이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나는 여기까지구나.’라는 상념이 숨의 빈자리로 스며든다. 그래, 몸을 그리 굵히지는 못했어도 열을 다해 살았다. 그리움의 힘으로 이만큼이라도 살았다. 하늘도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설령 못 보았다 해도 괜찮다. 이리 몸을 뽑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하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살 만큼 살았음을 어찌 모르랴. 이제 강대나무로 간다.   멀쑥한 키만 남기고 실없이 간다고 나를 웃지 말라. 나에게는 설레는 그리움의 힘이 있지 않았던가.

  어느 날 내리는 비바람의 손길을 타고 그 나무는 몸을 눕혔다. 품고 있는 그리움의 힘으로 새로운 그리움을 만들어 가리라며 아늑하게 누웠다.

  긴 그리움으로 보듬으며 마른 육신을 편안히 뉘었다.♣(20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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