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무의 사랑(2)

이청산 2021. 5. 23. 14:35

나무의 사랑(2)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를 보러 오른다. 산이 정겹고 아늑한 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없는 산이란 얼마나 황폐하고 거칠고 쓸쓸한가. 나무가 있어 산이 그립고, 산이 그리워 나무를 찾아간다. 마을에는 사람이 정을 가꾸고, 산에는 나무가 정을 가꾼다.

  나무는 산을 정답게 할 뿐만 아니라, 저를 보는 이들의 가슴도 정과 위안에 젖게 한다. 나무를 보고서도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는 이가 있을까. 그런 이가 있다면 나무 탓이 아니라 세속에 깊이 찌든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나무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자연적 존재로서의 생태적 자아로부터 너무 먼 자리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우석제, 『나무의 수사학』)라 한 것도 나무에 젖지 못하는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세상의 간난 속을 사는 이일수록 나무를 만나야 한다. 나무 품속 깊이 묻혀야 한다. 맑은 눈으로 나무를 보면 나무는 언제나 편안을 느끼게 하고 위안을 준다. 나무는 편안과 위안을 줄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 비밀을 어느 신문의 한 칼럼(조선일보, 2021.5.12., 「한삼희의 환경 칼럼」)이 넌짓 일러준다. 칼럼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수잰 시마드 교수가 했던 자작나무와 전나무 묘목을 이용한 실험을 소개하고 있다. 두 나무에 양분을 측정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하고, 전나무 묘목에는 빛이 닿지 않도록 검은 천막을 덮어 광합성을 못 하게 했다.

  그런 다음 일주일 뒤 찾아가 계수기를 갖다 댔더니 자작나무뿐 아니라 전나무에서도 ‘그~그~’ 하는 반응 음이 나왔다. 그 소리는 자작나무가 광합성으로 만들어낸 탄수화물 양분 일부가 전나무로도 건너간 반응이다.

  자작나무가 영양 결핍에 빠진 전나무에게 양분을 나눠준 것이다. 양분 전달이 가능한 것은 땅속 균사가 두 나무를 연결했기 때문이다. 이 균사 연결망을 통해 나무들끼리 양분을 주고받는다.

  산에는 키가 큰 나무 작은 나무, 줄기가 굵은 나무 가는 나무, 잎이 넓은 나무 좁은 나무……, 성질도 모양도 다 다른 갖가지 나무들이 오순도순 모여 산다. 산에 사는 나무 수는 하늘에 있는 별 숫자보다 많을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수많은 나무는 씨앗이 터 잡은 자리에서 저 홀로 나고 살면서도 서로 어울려 한 가족처럼 살아간다. 큰 나무라고 작은 나무를 깔보는 일도 없고, 굵은 나무라고 가는 나무를 얕보지도 않고, 잎 넓은 나무라고 잎 좁은 나무를 휘덮으려 하지도 않는다.

  오직 한 가지 다투는 게 있다면 서로 하늘에 가까이 닿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야 햇볕을 많이 받을 수 있고, 그 볕으로 광합성을 잘하여 양분을 잘 만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투면서도 나무는 나무에게 야속하지 않다. 약한 나무를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

  시마드와 그 제자들의 연구는 이어진다. 큰 나무는 자기의 그늘에 가려 광합성에 어려움을 겪는 작은 나무들을 돌본다는 사실도 확인했다고 한다. 시마드는 큰 나무를 ‘중심 나무(Hub Tree)’, 또는 ‘엄마 나무(Mother Tree)’라고 불렀다.

  그뿐 아니다. 나무가 친족을 알아본다고도 한다. 중심 나무가 친족 나무들에게 더 많은 양분을 나눠준다. 나무가 해충이나 병원균 공격을 받으면 그 정보를 땅속 연결망을 통해 이웃 나무들에 알려 방어 물질을 생성하게 해준다. 그래서 벌채하더라도 중심 나무는 남겨두어 새로 난 묘목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 연구가 사실이라면 나무도 느끼고 생각할 줄을 아는 것 같다. 그것은 제 새끼를 사랑할 줄 아는 동물의 본능처럼 나무의 본능일 수도 있다. 어쨌든 양분 넉넉한 나무가 배고픈 나무를 돕고, 붙이를 아낄 줄 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돕고 살자는 자각을 세워 서로를 위해 주려는 것도 아니고, 핏줄의 연 때문에 붙이를 지키고자 하는 의도나 의무로 하는 일도 아니기에 나무의 본성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어느 때 어떤 나무든 그렇게 사랑을 나누면서 그들의 삶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서로 위하고 살자면서 공정, 평등, 정의를 입버릇처럼 외치는 인간들은 어떤가. 권세를 많이 가진 이들일수록 그것을 더 많이 부리려 하고, 가난한 이들의 것을 오히려 앗아 저들의 욕심을 더욱 채우려 하지는 않는가. 내 편 네 편을 갈라 질시를 일삼지는 않는가.

  이 땅의 많은 어린 것들이 버려지고, 고통받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해야 하는 현실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오직 국민을 위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 중에 진실로 자신을 내던지면서 국민을 사랑할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되는가.

  나무를 다시 본다. 큰 나무가 사는 곳에 작은 나무도 살고 있고, 굵은 나무 옆에서도 가는 나무가 잘 자란다. 큰 나무가 작은 나무를 사랑하고, 굵은 나무가 가는 나무를 도와주고 있다. 나무는 한 송아리에서 나온 붙이를 향한 각별한 정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나무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 어떤 계산도 술수도 없는 사랑이다. 마냥 사랑하고 있다. 오직 무위의 사랑이기에 변하지도 않고 변할 수도 없는 사랑이다. 그런 사랑으로 사는 나무가 있는 산이 정겹다. 산에는 나무가 뿜어내는 사랑의 숨결이 끓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가 있어 정겨운 산을 오른다. 그 나무를 보러 오른다. 나무의 사랑에 안기려, 사랑의 나무를 안으려 산을 오른다.

  사랑은 사랑을 낳지 않는가.♣(202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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