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십계명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눈에 피로감이 느껴지는 듯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본다. 살벌하다. 눈이 더 뻑뻑해지는 것 같다. 산이 온통 상처투성이다. 산의 맨살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다. 애목 성목 가릴 것 없이 모두 잘려나갔다. 그야말로 인정사정 볼 것이 무차별로 베어버렸다.
그뿐만 아니다. 흉한이 휘두른 흉기에 죽죽 그어진 자상刺傷처럼 비탈을 가로질러 가며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다. 베어낸 나무들을 실어내기 위해 파헤친 길 자국이다. 살을 찢는 아수라의 비명이 몸서리치게 들려오고 있는 것 같다. 차라리 눈을 감는다. 창문에 암막이라도 치고 싶다.
크고 작은 것들이 서로 어울려 이루어진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다. 간혹 밤나무며 상수리나무 들도 섞여 있어 밤도 도토리도 구르곤 했다. 사시사철 푸르고 싱그럽고 삽상한 느낌을 주던 곳이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지척으로 다가와 온몸을 청량해지게 했다. 가볍고 시원한 느낌으로 눈길을 다시 책에다 얹곤 했다.
누가 그 산을 누구에게서 샀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나무들을 산판 업자에게 넘긴 모양이다. 산주나 업자나 이득만 취하면 될 일이지, 이것저것 가릴 일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위해 산을 사고 나무를 판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오고 있는 걸 그들은 알까. 그 산 앞에 창을 두고 있는 죄업일까.
그런 사람들에게 득리하는 일 말고는 무슨 말이 귀에 들 수 있을까. 이럴 때 ‘인디언 십계명’을 떠올리는 것은 물색없는 이의 부질없는 상념일까.
그 옛날 인디언들이 삶의 철칙으로 삼았던 십계명 중에는, 그들이 와칸탕카 곧 ‘위대한 정령’으로 숭배하는 자연계에 대한 계명 몇 가지가 있다. 그 첫째가 ‘대지는 우리의 어머니, 그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라는 것이고, 그다음으로 ‘나무와 동물과 새들, 당신의 모든 친척을 존중하라.’ 했고, ‘모든 생명은 신성한 것, 모든 존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라는 계명도 있다.
인디언은 대지를 모두의 어머니라 여겼다. 대지는 모든 것을 낳고 기르고 살게 해주기 때문이다. 봄이면 땅을 함부로 밟지 않는다. 혹 태어나는 것들이 밟힐까 저어해서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만큼 갈고, 가꾸고 파고 갈 때는 감사의 기도를 먼저 올린다. 대지는 위대한 정령의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사고팔 수도 없다고 여긴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어떤 푸나무일지라도, 하잘것없는 미물일지라도 다 같이 소중한 생명체로 여길 뿐 아니라, 모두 어머니 대지의 붙이로 소중한 친척으로 여긴다. 함부로 치고 빼앗고 베어서는 안 되고, 서로 존중하면서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했다. 그것들과 사람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는다.
특히, 나무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이런 일화가 있다.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 지팡이 삼아 걷고 있는 어린이에게 부족의 어른이 나무에게 허락을 구했는지, 필요한 만큼만 잘랐는지, 나무에게 감사를 표시했는지를 물었다. 어린이가 그냥 잘랐다고 말하자 자연에서 무엇을 취할 때는 나무에게 반드시 허락을 구해야 한다며 가르쳤다.
인디언들은 나무도 말을 한다고 믿고 있다. 나무들로부터 날씨, 동물, 위대한 정령 등에 대한 많은 것을 나무의 말을 통해 배운다고 한다. 나무 아래 서 있으면 살아 있는 모든 존재 속에 깃든 무한한 가능성을 실감한다고 했다. 비단 나무만이 아니라 인디언들은 모든 생명, 모든 존재를 신성한 것으로 여겨 항상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한다.
처참한 벌거숭이산을 보며 인디언의 삶과 계율을 떠올리는 나의 상념은 부질없다 할지언정, 인디언들의 이런 계명이 어찌 부질없다 하겠는가. 하지만, 이런 계명이 인디언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이 계명을 지키고 사는 인디언을 미개한 사람들로 몰아붙이는 흉포한 세력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백인들이다.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미명과 함께 문명의 병기들을 앞세우고, 청결한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인디언의 땅을 무참하게 침노해 왔다. 신대륙이 아니라 순박한 사람들이 자연의 변전을 더 할 수 없는 진리로 믿으며 오랜 유서와 함께 오순도순 화목하게 사는 땅이었다.
백인들은 자기네 문명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디언들을 야만인으로 몰아 내쫓으며, 그 땅의 나무를 마구 베고 파헤쳐 높은 건물을 짓고 철로를 놓기 시작했다. 백인들이 점차 세력을 넓혀가게 되면서 인심이 야박해지고, 전염병이 창궐하고, 범죄들이 만연해 갔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에게 계획적으로 전염병을 퍼뜨리기도 했는데, 인디언들은 이를 두고 ‘콜럼버스의 악수’라 했다. 인디언들은 서서히 삶의 터전을 잃으면서 쇠잔해져 갔다.
내가 마치 그 인디언이 된 것 같다. 문명한 자본의 폭력으로 인해 그지없이 피폐해져 버린 저 창밖의 살풍경을 늘 마주하다 보면 나의 모든 기력이 소진해 갈 것만 같다. 어쩌랴. 어찌해야 하랴! 저 문명한 사람들의 참혹한 폭력 앞에서-. ♣(2025. 3. 2)
[참고] 인디언 십계명
대지는 우리의 어머니, 그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
나무와 동물과 새들, 당신의 모든 친척들을 존중하라.
위대한 신비를 향해 당신의 가슴과 영혼을 열라.
모든 생명은 신성한 것, 모든 존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
모두에게 선한 일을 행하라.
모든 새로운 날마다 위대한 신비에게 감사하라.
진실을 말하라. 하지만 사람들 속에선 오직 선한 것만을 보라.
자연의 리듬을 따르라. 태양과 함께 일어나고 태양과 함께 잠들어라.
삶의 여행을 즐기라. 하지만 발자취를 남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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