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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겨 놓은 것들

내가 남겨 놓은 것들 어느 날 아침, 날이 밝아와 눈을 떠보니 내가 죽었다. 날마다 해거름이면 아늑히 오르는 산을 올라 숲을 걷고 나무를 보며 상념에 젖다가 내려왔다. 몸을 씻고 이따금 즐겨 마시는 막걸리 한잔하고 잠이 들었다. 그 길로 길고 깊은 잠이 든 것 같다. 다양한 사회 경륜과 함께 장관도 지내고 테니스를 좋아했던 어떤 분은 어느 날 오전에 한 게임 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한 다음 와인 한잔하고 잠들었다가 그대로 영면했다 한다. 향년 88세였다 한다. 조용헌 명리학자는 그 죽음을 두고 거의 ‘신선급’ 죽음이라 했다. 나는 이렇다 할 경륜도 없고, 그분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딴은 산전수전 겪다가 물러나 산수 좋은 곳을 찾아와 살면서 이리 가니,..

청우헌수필 2023.01.28

그리움의 힘

그리움의 힘 고사목이 된 긴 소나무 하나가 누워 있다. 큰 소나무가 아니라 긴 소나무다. 길이가 네댓 길은 족히 넘을 것 같다. 굵기는 가장 밑동 부분의 지름이 고작 한 손아귀를 조금 넘어서고, 꼭대기 부분은 엄지손가락 굵기에 불과하다. 이 나무는 살아생전에 굵기는 별로 돌보지 않고 키만 죽을힘을 다해 키우려 했던 것 같다. 가지도 별로 없다. 주위에는 큰 나무들이 늠름히 서 있다. 아마도 이 나무는 큰 나무가 떨어뜨린 씨앗에서 생명을 얻어 움이 트고 싹이 솟아 나무의 모습을 이루어간 것 같다. 대부분 나무는 바람이나 무엇의 힘을 빌리더라도 자신의 종자를 멀리 보내기 위해 애를 쓴다. 어미의 발치에 나서 어미와 서로 빛과 양분을 다투어야 하는 몹쓸 짓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씨앗은 불행히(?)도 어..

청우헌수필 2023.01.10 (2)

주는 마음 받는 마음

주는 마음 받는 마음 지하철 전동차를 탔다. 좌석은 다 찼고 서 있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가방을 든 채 출입문 옆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갔다. 앉아 있는 사람 중에는 젊은 사람들도 많은데, 대부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다가 건너편 좌석 중간쯤에 앉아 있는 중년 신사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오라고 손짓했다. 다가가니 일어서면서 앉으라 했다. 곧 내릴 사람인가 보다 하고, 감사하다며 앉았다. 그 신사는 반대편 문 쪽으로 가서 섰다. 한 역, 두 역…, 몇 역을 지나쳐도 내리지 않았다.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몸을 숨기듯 서 있는 사람들 속을 파고들었다. 내가 내릴 때도 그는 내리지 않고 등을 지고 서 있었다. 내가 서 있을 때 가까이에 앉아 있지도 않았고, 앉은 이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나..

청우헌수필 2022.12.26

황혼 녘의 소담한 열매

황혼 녘의 소담한 열매 나뭇잎이 푸르고 붉었던 열정의 계절을 보내고 제자리를 찾아 내려앉고 있는 늦가을 어느 날 저물녘, 문학상 수상 대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글과 더불어 살아온 평생에 ‘나도 이런 상 한번 받아 보고 싶다’라는 선망이 왜 없었을까만, 막상 그 일이 내 앞에 오고 보니 기쁘고 감사한 마음과 함께 주저로운 느낌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 지금 한창 의기롭게 글을 빚고 있는 젊은 문학인들도 많을 텐데, 의기와 열정의 시절을 다 떨쳐 보내고, 조용히 살 거라며 한촌 산곡에 깃들어 살고 있는 내가 껴안는 빛나는 상패와 근엄한 상장이 몸에 맞지 않은 옷 같지나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오늘 수상 대상이 된 내 책이 첫 책을 낸 지 꼭 이십 년 만에 우여곡절과 더불어 낸 것이라..

청우헌수필 2022.12.12 (1)

나무의 밥벌이

나무의 밥벌이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을 다채로이 수놓던 나뭇잎들이 지고 있다. 어떤 나무는 벌써 드러낸 맨살로 하늘을 바라고 있다. 떨어지는 잎의 몸짓이 유장하다. 마치 일꾼이 이제는 할 일을 다 했노라며 가벼이 손을 털고 일터를 나서는 모습 같다. 가지도 한결 가볍다. 지난 철 동안 우린 열심히 살았다. 나는 물을 대어주고 너는 양식을 마련하여 먹거리를 만들고 하면서 알콩달콩 잘 지냈구나. 새 철이 오면 우리 다시 만나 또 한 번 아기자기 지내보자꾸나. 흔드는 가지의 손길이 정겹다. 가지와 잎의 정담이 귓전에 어른거린다. 저들은 결코 헤어지는 게 아니다. 어디에 있으나 한 몸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철들을 저마다의 일들로 열심히 살다가 한철 편안히 휴가에 든다. 그 휴가에서 돌아오면 다시 다시 한 몸 ..

청우헌수필 2022.11.23 (1)

시를 꿈꾸는 사람들

시를 꿈꾸는 사람들 -제10회 구미낭송가협회 시낭송콘서트를 마치고 열 번째의 시 낭송 콘서트가 열렸다. 이번 콘서트의 주제는 ‘가을, 시를 꿈꾸다.’로 정하여 열 번째를 기리기로 했단다. ‘열 번째’가 주는 특별한 감회 때문인지 출연자들의 감회와 각오가 유달라 보였다. 무대를 오르는 걸음걸음마다 설렘과 열정이 배어나는 것 같았다. 혼자서 열연하기보다는 윤송, 합송, 시 퍼포먼스, 시극 등 여럿이서 마음 맞추어서 하는 낭송법을 택했다. 서로 어울려 한마음으로 빚어내는 시의 아름다움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세상 사는 일이란 함께 마음 맞추는 일이 아니던가. 짬만 나면 모이고, 모일 곳만 보이면 만났다. 이른 아침에도 모이고, 해 맑은 낮에도 만나고, 해거름 빛 속에서도 마음을 모았다. 어느 강의실에서도 목소리..

청우헌수필 2022.11.07 (1)

풀숲 길이 좋다

풀숲 길이 좋다 오늘도 아침 산책길을 걷는다. 두렁길 지나 마을 숲에 이르러 깊은숨 들이쉬며 체조하고 강둑길에 오른다. 강둑길을 걸으며 물도 보고 풀꽃도 보다가 그 길이 끝나면 산을 파헤쳐 길을 낸 곳을 오르고 내려 골짜기로 든다. 나의 산책은 변함없지만, 걷는 길이 많이 변했다. 지난날의 강둑길이 그립다. 산이 막아서는 길 끝까지가 풀숲 길이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풀잎에 맺힌 이슬에 바짓가랑이가 젖기도 하고, 도깨비바늘을 비롯한 풀씨들이 달라붙고, 칡이며 환삼덩굴이 발목을 걸어 성가시게도 했다. 그래도 그 길이 좋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걸 귀찮게 여겨 관에다 진정했다. 어느 날 갖가지 장비를 동원하여 풀숲을 걷어내고 회반죽을 들이부었다. 바짓가랑이도 안 적시고, 덩굴이 발목을 잡지도 않는 길이 되었..

청우헌수필 2022.10.29

아름다운 예술 섬을 바라며

아름다운 예술 섬을 바라며 『울릉문학』지가 15집을 내게 되었다니 감회가 각별하다. 연간지로 내는 것이니 그만한 햇수의 세월이 쌓였다는 것이다. 언제 세월이 그리 흘렀을까. 나는 지금도 울릉도가 그립다. ‘신비의 섬’ 그 신비가 그립다. 나의 그 그리움 속에는 소곳한 보람도 자리하고 있지만, 아릿한 기억의 희미한 그림자도 함께 어려 있다. 두 번째로 울릉도 발령을 받았을 때는 주위 사람들 모두가 천만뜻밖이라 했다. 울릉도란 승진을 위해서 가거나 승진하여 초임 발령으로 가는 곳인데, 이미 승진하여 초임도 겪은 사람이 왜 울릉도로 가는지 모르겠다며, 의문과 걱정과 위로가 함께 섞인 말씀들을 전해왔다. 나만의 비밀스런 일을 그들이 알 리가 없다. 그 몇 해 전에 울릉도로 발령받아 해포를 살다가 나왔었다. 바다..

청우헌수필 2022.10.11 (1)

나무의 숙명

나무의 숙명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오르며 묻는다. 나는 왜 지금 이 산을 오르고 있는가.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떠한 길을 걸어 이 산에 이르렀는가. 그 ‘어디’는 어떻게 얻은 것이고, 그 ‘길’은 또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 얼마나 많은 세월의 테를 감으며 여기까지 왔는가. 나는 지금 나무를 보러 오르고 있다. 나무는 나의 거울이다. 나는 태어난 곳에서부터 왔다. 태어나보니 태어난 곳이었다. 아득한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순로가 손잡아 끌기도 했지만, 험로가 밀쳐내기도 하는 길을 힘겹게 걷기도 했다. 나무를 본다. 저도 이곳을 가려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람에 불리다가, 혹은 어느 새의 부리를 타고, 또는 뉘 몸에 의지해서 땅에 떨어지고, 그 자리가 제자리 되어 싹이 트고 자랐을 것이..

청우헌수필 2022.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