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인간과 사람

이청산 2024. 6. 23. 15:01

인간과 사람

 

  ‘인간’과 ‘사람’은 한뜻을 지닌 같은 말일까? 인간이 곧 사람이고, 사람이 곧 인간일까? 국어사전의 풀이대로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사전에서 제일의로 풀이하는 말은 “인간 :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사람.”, “사람 :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인간”이라 하여 동의어로 새기고 있다.

  철학적, 윤리적인 정의를 내리려는 게 아니다. 내 삶에 화두를 두고 그 뜻을 새겨보고 싶을 뿐이다. 어떻게 정의해도, 내가 생각하는 ‘인간’, ‘사람’의 개념일 뿐이다. 그 개념으로 사전의 그 풀이를 인용認容할지라도, 사람은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에 방점을 두고 싶고, 인간은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 같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나는 하루에도 인간과 사람을 바꾸어서 하고, 요일을 두고도 사람으로 사는 요일이 있고 인간이 되는 요일이 있다. 인간으로든, 사람으로든 희로애락애오욕의 칠정은 다 겪겠지만, 그 속내는 다를 수 있다. 요즈음의 나는 인간으로보다는 사람으로 사는 시간이 훨씬 많은 것 같다.

  외로운 사람으로부터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세상에 사람이라곤 나 하나뿐인 것 같다. 같이 눈을 뜰 사람도, 옷을 챙겨 줄 사람도 없다. 혼자 눈을 떠서 혼자 옷을 찾아 입어야 한다. 아픈 곳이 있어도 혼자 아파해야 하고, 아픔을 다스리려 먹는 약도 홀로 꾸려 먹어야 한다. 내 어찌 인간일 수 있으며, 나의 사회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 참담에 빠지지 않아도 된다. 곧 인간이 될 수 있다. 나의 처지를 어여삐 여긴 사회 기관에서 치병에 도움 삼으라고 어떤 이를 보내주었다. 그는 내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고, 잘 빨린 옷을 입을 수 있도록 해주면서, 나의 처지를 걱정도 해준다. 나는 그에게 깊이 감사하며 마음을 함께 나눈다. 그와 함께하는 나의 사회다. 그때 나는 인간이 된다.

  내 그 사회의 생명은 길지 않다. 하루 두어 시간만 함께하면 내 사회는 이내 깨어진다. 임무를 마친 그는 돌아가야 하고, 나는 다시 외로운 사람으로 복귀해야 한다. 혼자 생각해야 하고, 아픈 곳도 혼자 다스려야 하고, 말도 혼자 해야 한다. 그때 내 말은 입말이 아니라 글말이다. 고적한 자취를 일기로 적고, 아프고 외로운 삶을 수필로 쓴다. 수필이란 삶의 고백이 아니던가. 모든 것을 오직 홀로 해야 하니, 사회를 이루어 사는 인간이 아니라 아프고 외로운 사람일 뿐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 날도 없지 않다. 매주 금요일이면 집을 나선다. 차를 타고 달려가다가 내리면 고맙게도 마중 나오는 분이 있다. 그분과 더불어 어느 음식점에 이르면 점심을 같이할 분들이 기다린다. 반갑고 감사한 마음을 나누며 화기롭게 같이 점심을 먹고 어느 도서관 강의실로 간다. 회원들과 함께 아는 것을 서로 나눈다. 활기찬 나의 사회다. 나는 기쁘고 즐거운 인간이 된다.

  수필을 함께 공부하는 모임이다. 수필에 대해 일가를 이루지도 못했지만, 사는 일이며 쓰는 일을 조금 먼저 해왔다고, 내 말을 열심히 들어주는 분들이 있어 기쁘고 고맙다.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글을 통해 때로는 활짝 웃기도 하고, 가끔은 눈자위를 적시기도 하면서 서로의 삶을 나누다 보면, 나는 아프고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 따뜻하고 활기찬 인간이 된다. ‘타인과 함께 나누어 가져야 이웃이 될 수 있고, 인간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이 새삼스레 울려온다.

그런 인간적인 관계는 또 있다. 한 달 중 몇째 어느 요일 밤은 그리운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다. 막걸릿잔을 나누며, 이제 우리 해야 할 일은 건강을 잘 건사하는 것뿐이라며 서로를 염려해주고, 때로는 삶의 철학이며 정치 사회의 현상에 관한 고담준론을 나누면서 유머를 섞기도 한다. 잔에 담기는 말은 정 아닌 게 없다. 얼마나 즐거운 나의 사회인가. 나는 오래오래 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인간이 된다.

  그런 일들을 끝내고 다음에 다시 보자며 집으로 돌아온다. 모든 관계는 또 적막해진다. 혼자 자고, 혼자 먹고, 혼자 말하고, 병도 혼자 다스리는 외로운 날들이 나를 기다릴 뿐이다. 물론 아주 혼자는 아니다. 내가 혼자서 하는 모든 일이란 모두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들이 아닌가.

  그렇지만, 가슴에 켜를 짓는 쓸쓸함은 외로운 사람임을 떨쳐 버릴 수 없게 한다. 어느 시인이 말하듯 외로우니까 사람일까. 그래도 마냥 외롭지만은 않다. 글이라는 나의 속 깊은 통화자가 있다. 어느 때가 되면 기쁘고 즐거운 인간이 된다는 소곳한 기대가 있다. 그 통화자와 기대를 아울러 보듬으며 잠자리에 든다. 아늑한 꿈결로 든다. ♣ (2024.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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