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일기

그러나 가을은 -마성일기.44

이청산 2006. 11. 13. 11:03

그러나 가을은
-마성일기·44



 소야천 위에서 본 가을 주흘산

이 한촌 벽지의 가을을 다시 맞고 싶지는 않았다. 온갖 풀이며 나무들이 무성하게 살고 있고, 질펀한 들판이 펼쳐져 있고, 우뚝한 산이 사방으로 둘러쳐진 곳의 가을은 한 번만 겪는 것으로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산이며 들판의 그 현란한 빛깔의 잔치, 여기 저기서 툭툭 떨어지던 열매들, 마당이며 길거리를 가리지 않고 날려대는 낙엽들이며……. 그 모든 것들이 빚어내는 고혹(蠱惑)도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저들만의 무슨 요술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도 같아 그 소적(蕭寂)을 견디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그 요란한 잔치 끝자락에 묻어올 소슬(蕭瑟)과 고한(苦寒)을 생각하면, 저들은 지금 찬란한 가면무도회를 벌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한촌의 겨울은 몹시도 추웠었다. 겨울이 추웠던 게 아니라 이 한촌이 바로 추위였다. 한촌은 추위도 더위도 물리칠 줄을 모른다. 저 산야의 온갖 초목이 절로 나서 절로 자라도록 놔두듯이 땅과 하늘이 열기를 뿜든 한기를 뿜든 그대로 놓아버린다. 바람은 풀숲이든 수림 속이든 막힘 없이 드나든다. 어차피 이곳은 풀과 나무와 바람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촌의 추위는 몸도 마음도 남을 곳 별로 없이 얼어붙게 한다.

 

색깔의 찬란한 잔치가 벌어지기 전에, 그 흥성한 잔치 끝의 추위가 묻어 오기 전에 한촌을 떠나고 싶었다. 그 아름다움의 감동도, 뼛속을 스미던 추위도 기억 속에 고이 접어 넣어 두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마음먹은 대로만 될 수는 없었다. 꽃이 핀 다음에야 열매를 맺듯이, 겨울이 간 뒤에야 봄이 오듯이, 인과가 있고 순서가 있는 모양이었다. 오고 감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사를 따라 또 한 번 한촌의 가을을 살아야 했다.

 

외면하고 싶었다. 하늘이 어떻게 되든, 산야가 어찌 변하든, 나뭇잎이 무슨 빛깔을 띠든 못 본 체하려 했다. 그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하늘이요 산과 들이요 나뭇잎이거니, 계절은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를 스쳐 가는 것이거니 생각하며 일상을 살려고 했다. 그렇게 길을 달리고 산을 올랐다. 이 가을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러나 가을은 오고, 그리고 가고 있었다. 마당에 서 있는 은행나무에서는 노란 열매가 줄줄이 떨어지고, 밤나무에서도 송이가 터지면서 윤기 나는 밤이 툭툭 떨어졌다. 교정의 단풍나무는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처럼 하루가 다르게 짙붉은 빛을 더해갔다. 소야천 물가의 갈대들은 갈꽃 하얀 가루를 흩날리고, 방축 길의 벚나무는 지난 봄 화려했던 꽃의 기억을 주지봉을 오르는 길의 낙엽깊이 묻어둔 채 푸르던 잎이 황갈색으로 변해 가며 또 한번 꽃을 피워냈다. 산길이 온통 가지각색의 낙엽으로 덮인다. 봉우리를 향해 오르다 말고 길을 잃는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산인가. 지난 여름의 그 싱그러운 잎새들은 감추어두었던 갖가지의 색소를 원 없이 뿜어내고 있다. 빛깔들이 서로 섞이고 어울리면서 또 다른 색들을 빚어내며 빛깔의 향연을 벌리고 있다. 그리고 가슴도 이들을 따라 울렁거렸다.

 

나의 외면으로 가을은 오지 않을 것인가. 그 가을 끄트머리에서 묻어올 한촌의 찬바람도 불어오지 않을 것인가. 참으로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이다. 손바닥으로 어찌 세상을 가릴 수 있단 말인가. 계절의 변화가 눈을 현란하게 할지라도, 그것이 감동 혹은 우수를 가져올지라도, 마침내는 찬바람을 불게 하여 몸도 마음도 시리게 할지라도, 내가 안아야 하고, 안겨야 할 것임을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속일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랑할 일이다. 가을을 사랑하고 그 빛깔을 사랑하고, 그 빛깔 뒤에 숨어 있는 한촌의 겨울마저 사랑할 일이다. 바람과 함께 사는 한촌을 사랑할 일이다. 추위는 추위를 부르고, 미움은 또한 미움을 부를 것이지 않은가. 뼛속까지 시리게 했던 한촌의 추위였지만 사랑하다 보면, 애써 사랑하다 보면 추위조차도 온기를 띨 수 있게 되리라. 사랑은 사랑을 부르고 정은 정을 낳을 것이지 않은가.

가을이 가고 있다. 겨울이 오고 있다.

따뜻하게 부지런히 살아갈 일이다.♣(2006. 1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