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일기

마성에 비 내리면

이청산 2006. 7. 12. 10:07

마성에 비 내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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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일기·41



마성은 한때 온 천지에 시커먼 석탄가루가 풀풀 날리던 탄광촌이었다. 그 때 사람들은 까만 옷에 까만 얼굴로 살았다. 그래도 그 땐 사람들도 많고, 동네도 번성하고, 기차도 다녔다. 이삼십 년 전의 일이다. 탄광이 모두 문을 닫은 지 십 오륙 년이 지난 지금은 산도 푸르고 물도 맑고 하늘도 깨끗하다. 그러나 사람이 귀한 한촌 벽지가 되어버렸다. 길에도 들에도 학교에도 사람이 드물고, 기차가 달리던 철길은 녹슨 채 잡초 속에 묻혀 있다. 새소리, 바람소리만 더욱 맑아졌다. 산에 들에 이름 모를 풀과 나무만 더욱 무성해졌다.

토요일, 비가 내리고 있다. 남녘 바닷가에 가족을 두고 있는 이 선생이 이번 주말에는 먼 귀향 길을 접고 마성에서 쉬겠다더니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머나먼 고향집을 향해 달려갔다. 비가 오기 때문이다. 마성에 비가 내리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산에도 오를 수 없고, 강에도 갈 수 없고, 오직 고적감만 삼켜야 할 뿐이라는 것이다. 만나려야 사람도 없고, 즐기려야 산이며 강뿐인 마성에 비가 내리면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창살 없는 감옥이다. 아니 그 빗줄기가 바로 감옥의 창살이다.

나는 해거름이면 언제나 산에 오른다. 운동 삼아 오르기 시작한 산이었지만, 자꾸 오르다 보니 산이 좋아지고, 걷기도 즐거워졌다. 그렇게 산 오르기를 즐기는 사이에 해거름 산행은 떨쳐버릴 수 없는 습성이요, 관성이 되어 버렸다. 마성에 와서 주지봉을 발견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간 지방이긴 하나, 매일을 두고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작은 산 하나 찾아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지봉이 없었다면 습성을 주체하기도 어렵거니와, 적적한 마성의 생활을 견뎌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산 오르기가 없는 마성에서의 생활이란 상상도 할 수 없다. 상쾌하게 흘리는 땀으로 유쾌한 운동이 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사색에 젖으며 산길을 걷는 것이 생활의 큰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봉우리 위에 서서 고요하고 평화로운 한촌의 풍경을 음미하노라면 마음도 그 고요와 평화에 젖어 드는 것 같다. 마성에서의 산 오르기는 고적한 벽지 생활을 생기 찬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하루도 산에 오르지 않으면 무슨 금단 현상 같은 것이 온몸을 스멀스멀 파고드는 것 같다.

그 마성에 비가 내려 산을 오를 수 없게 되는 날은 너무도 갑갑하고 쓸쓸하다. 고적감은 이내 고독감으로 변해 버린다. 온몸을 옥죄는 듯한 고독이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거나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도 저마다 홀로 서 있듯이 인간 역시 무한 고독의 존재'라고 한 법정 스님의 말씀에 가슴이 젖기도 하지만, 그 '고독'의 의미를 반추하면서 고독감을 여과시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 의미를 아무리 되새긴들 산에 오를 수 없는 그 답답함이 해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성에 내리는 비는 치유될 수 없는 고독에 젖게 한다.

울릉도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참 아름다운 섬이었다.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와 봉우리의 모습, 뭍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풀과 꽃과 나무들, 그리고 깊고 넓은 바다의 청옥 물빛이 한데 어울려 빚어내는 비경들에 취하여 하염없이 섬 길을 걸었다. 그 섬의 길이란 길은 안 걸어 본 곳이 없을 만큼 섬 사랑에 한껏 젖어 걷고 또 걸었다. 그 때 섬 살이는 참 행복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성인봉 정상에 올랐을 때였다. '성인봉' 표지석이 서 있는 맨 꼭대기에 서서 이마에 땀을 그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나는 꼼짝할 수 없이 포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광대 무변의 그 넓은 바다 한 가운데 조그만 산 하나 떠 있는데, 그 꼭대기에 내가 달랑 서 있고 사방은 가없이 넓고 깊은 바다가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덜컥 겁이 났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헤어날 길 없는 절망 같은 고독감이 전신을 엄습해 왔다. 심장의 박동이 갑자기 빨라지는 듯했다. 수년이 흐른 지금은 그 고독감조차 감당할 수 없는 그리움이 되어 있지만, 그 땐 왜 그리 가슴이 쿵쿵거렸던지 모르겠다.

마성의 비도 절망처럼 사람을 포위한다. 감옥을 만든다. 울릉도의 감옥은, 쉽게 탈출할 수 없을지라도 문 넓은 창 같은 바다가 있었다. 나무가 있고, 산이 있고, 하늘이 있었다. 그러나 비 내리는 마성은 사방 온통 창살뿐이다. 한 평도 안 될 것 같은 좁고도 답답한 감옥이다. 고독과 그리움만이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감옥이다. 어제 본 그 산이요 그 풍경이건만, 비 내리는 날이면 먼 이야기처럼 그립다. 등걸나무 총총히 놓인 계단 길이 그립고, 그 길의 풀과 나무 그리고 새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가 그립고, 적막하지만 평화로운 마성의 풍경이 그립다. 그 가파른 길 오르며 흘리던 그 상쾌한 땀도 못내 그립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있다. 우듬지를 적시던 빗줄기가 우람한 등걸을 적시고, 풀잎을 젖게 하던 빗물이 땅 속 깊은 곳을 파고든다. 땅 속만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다. 가슴속 깊은 곳으로도 스며 내린다. 이 선생은 가슴속을 스미는 그 빗줄기를 피하기 위하여, 빗줄기 창살을 뚫으면서 먼 길을 달려갔을 것이다. 마성에 내리는 비, 그 고독의 성을 탈출하기 위하여 고향집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어차피 젖을 것이거늘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우장을 차려 입는다. 우장도 없이 빗길을 걷기란 또 얼마나 쓸쓸한 것인가. 길을 나선다. 빗속을 걷는다. 산을 오른다. 가풀막이 미끄럽다. 아무리 미끄러져도 정상은 늘 마성의 평화를 품고 있지 않던가. 빗방울이 떨어진다. 하늘에서도 떨어지지만, 사방의 나무에서도 떨어진다. 떨어진 빗물은 온몸을 적신다. 몸이 젖어도 좋다. 몸을 적시는 빗물을 견뎌내기보다 빗줄기가 둘러치는 고독의 창살을 이겨내기가 더 힘든 일이 아니던가.♣ (2006.7.1 마성의 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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