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일기

유붕이 자원방래면 -마성일기.43

이청산 2006. 10. 26. 14:49

유붕이 자원방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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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일기·43



친구가 먼 길을 찾아왔다. 박 선생이 내 적적히 사는 사택을 찾아 온 것은 구월이 다하는 날의 토요일이었다. 대구에서부터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길을 바꾸어 한참을 헤맨 끝에 땅거미 짙어오던 저녁 무렵에야 내 사는 집에 이르렀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아내와 나는 마당 가장자리 한쪽에 장작불을 훨훨 피웠다. 불은 친구를 기다리는 내 마음처럼 타올랐다. 호두나무 아래 평상에는 막걸리 상을 차려 놓았다.

드디어 멀리서 다가오던 자동차 불빛이 사립 앞에 멈추었다. 그는 호방한 웃음소리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이게 얼마 만인가! 잡은 손을 몇 번이나 흔들며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함께 잔을 나누며 지난날의 기억들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그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25년 전의 3월, 경주에서였다. 삼십대 중반을 들어서려는 때의 방장한 시절이었다. 교직의 경력도 몇 년씩 붙어 있을 즈음이었고, 아이들도 딸린 가장으로서 가족들과 함께 삶의 경륜을 쌓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는 영어교사로 연극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연출도 하고, 직접 햄릿이 되어 연기를 한 적이 있다고도 했다. 그는 영어를 아주 재미있게 가르칠 뿐만 아니라 유머도 풍부하여 학생들은 물론 동료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그는 주흥도 즐길 줄 알았다. 나와는 주로 주붕이 되어 많이 어울렸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지만, 둘이서도 많이 어울렸다. 학교 근처에 어느 할매가 경영하는 '판문점'이라는 이름의 막걸리집이 있었다. 둘이 앉아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문학과 연극도 이야기하고, 살아갈 일들을 논하기도 했다. "알아서 자시고 가시우"하고 주인 할매가 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어도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시도 이야기하고 정치도 논하는 사이에 점점 의기가 투합해 갔다. 어느 날은 흐르는 냇물에 비친 달이 보이는 숲에 앉아 밤이 이슥토록 고담준론(?)을 나누기도 했다. "야! 무대 좋고 조명 좋다. 지금부터 레디 액션!"하면서 시작한 담론은 달빛은 점점 엷어지는데도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그 날 그 장면은 우리들이 '유림의 달밤'으로 명명한,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이 되어 있다. 또 어느 날 밤은 바닷가에 앉아 파도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시를 읊기도 하면서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젖어 가기도 했다. 때로는 두 집 식구들이 어울려 야유를 나서기도 했다. 자가용도 없을 때였다. 몇 번씩이나 버스를 갈아타면서, 무주구천동도 가고, 밀양 얼음골도 갔다.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어린것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시간들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인사 발령으로 나는 구미로 가고, 뒤이어 그도 집안 사정으로 부산으로 갔다. 박 선생과는 고작 한 해를 같이 근무했을 뿐이었지만,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속담처럼 그와 나에게는 쌓여진 이야기며 추억들이 너무 많았다. 그 후로 그와 나는 간혹 연락은 주고받았지만, 만나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만나지는 못해도 간혹 연락이 닿을 때마다 지난날의 추억을 반추하면서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 나갔다.

"그래, 경주서 헤어진 후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부산으로 찾아갔을 때였지?"

가끔씩 나누는 소식만으로는 그리움을 다 삭힐 수 없어 내외 함께 부산으로 그를 찾아갔던 때를 추억했다. 모처럼 부산을 왔다고 용두산공원이며, 태종대며 시내를 구경시켜 주었다. 그리고 막걸리 잔 앞에 놓은 채 밤 가는 줄 모르고 회포를 풀었었다.

 

지난날의 추억에 젖어 드는 사이에 마당의 장작불은 불꽃이 지고 바알간 잉걸불이 되어 갔다. 고기 굽히는 냄새가 부드러운 밤바람을 타고 후각을 간질인다.

"자! 우리 다 같이 한잔하자구." 두 부부 함께 잔을 높이 들었다.

"우리의 사랑과 건강을 위하여!"

투두둑! 마당가에 서있는 밤나무의 밤송이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저 밤나무도 우리를 축하해 주나 뵈, 하하하!"

박 선생은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쳤다.

"참, 왜 그리 바삐 살아야 하는지, 한 철에 한 번씩이라도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박 선생이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대구로 온 것이 몇 해 전이다. 부산보다는 좀더 가까이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 마주하여 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근거는 대구로 두고 있었지만, 울릉도며 한촌 벽지로 떠돌고 있었고, 그는 그대로 살아가는 일이 바빴다. 서로 만나 술잔을 같이 나누는 것은 벼르고 별러서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늘 우리는 '만남'에 대한 갈증으로 만남을 대신하며 간혹 안부 전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 그가 문득 전화를 했다. 아침부터 웬 전화일까?

"지난밤에 선친께서 돌아가셨네. 이른 아침이지만 자네에겐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그래! 무어라 위로해야할지 모르겠네. 잘 알겠네."

그는 발인 날짜며 장지도 알려 주었다. 일이 난감했다.

아들이 결혼한 지 삼 년 만에 딸을 낳았다. 그 무렵 집안에 초상이 났는데, 문상을 마친 며칠 뒤에 손녀가 태어난 것이다. 문상 후에는 갓난아이를 바로 대면치 않는 법이라고 초칠 일이 지나면 새 아이를 만나라며 집안 어른들이 권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초칠 일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박 선생으로부터 어른의 부음을 받은 것이다.

 

박 선생을 찾아 문상한 것은 장례가 끝나고, 손녀를 처음으로 만나보고 온 뒤였다. 박 선생이 얼마나 서운하게 생각했을까.

"내가 큰 죄를 지었네. 용서하시게."

박 선생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양해를 구했다.

"아냐, 자네에게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줄 알았어. 조금도 괘념할 것 없네. 하하"

사람이 서로 정을 나누고 사는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나의 사정과 마음을 훤히 이해하고 있었다.

"언제 주말 시간 봐서 내 살고 있는 곳으로 한번 오시게. 좀 고적하긴 해도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이거든"

"그리 함세. 나도 자네의 전원 살이를 보고 싶네."

그래서 그는 이 밤에 나와 함께 앉았다.

하얗게 타 들어가는 불잉걸 위로 장작을 얹었다. 다시 꽃불이 피어났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다. 누구에선지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 나왔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노래가 끝나자 손뼉을 쳤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무슨 청춘 시절 같네!"

"나이가 무슨 상관이우? 즐겁게 살면 되는 거지."

우리는 나이를 잠시 잊고 있었다. 나이만 잊은 게 아니었다. 시간도 공간도 모두 잊었다. 하늘의 총총한 별이 술잔 속으로 내려앉았다.

이튿날 아침, 지난밤의 평상 위에 다시 앉았다.

"술이 많이 취했지요?"

"다 취했는데 누가 취한 걸 어떻게 알아?"

우리는 한 바탕 같이 웃었다.

친구와 문경의 고모산성에 오르다"이 골짝까지 왔으니 경치 한번 살피고 가야 할 것이 아닌가."

고모산성에 올라 경북 팔경 중에 제일이라는 진남교반의 풍경을 함께 즐겼다.

"세월도 자꾸 가고, 몸도 자꾸 늙어 가는데, 우리 좀 자주 만나고 살자고."

정에 젖고 술에 취했던, 잉걸불 발갛게 피어나던 지난밤을 다시 이야기하며, 별과 나무 그리고 진남교반의 아름다운 경치를 다시 새기며 박 선생 부부는 고적한 마을을 떠나갔다. 차를 돌려세우면서도 손을 흔들고,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몇 번을 다시 흔들며 떠나갔다.

오랫동안 묵혀 두고 있었던 외할아버지의 문집을 이제사 정리하며 읽는데, 문득 이런 구절이 가슴에 안겨 왔다.

 

 "不知何術長相對 무슨 수로 길이 서로 대할 수 있을지를 모르겠으니,

 無別無思度此生 헤어지지도 말고 생각도 말고 다만 이렇게 사세나."

 

 지금의 나를 위해 지으신 노래처럼 느껴졌다.

박 선생이 떠난 한참 동안,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함께 했던 그 밤의 정경을 떠올리면 남 모르는 귀한 것 하나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이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한 가슴은 늘 따뜻하고 촉촉하게 젖어 있을 것 같다.

 有朋而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200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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