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일기

세월을 보다 -마성일기.42

이청산 2006. 10. 26. 14:48

세월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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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일기·42



오늘 해거름에도 어김없이 자전거를 달려나간다. 마을을 지나 신작로를 가로질러 방죽 위를 달린다. 무성한 갈대며 물풀 사이로 파란 하늘을 담은 물이 흐른다. 푸른색이 조금씩 엷어져 가는 건넛산 위에 해가 걸려 산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난봄의 그 화사했던 꽃의 행렬은 추억으로만 간직한 채 시나브로 가을빛을 띠어 가고 있는 방죽 위의 벚나무 그림자가 자전거 바퀴에 감기며 달아나고 있다. 바퀴에 감기는 것은 나무의 그림자가 아니라 세월이다. 달아나는 것 또한 세월이다.

다리를 건너 산자락 아래 마을공원에 이른다. 커다란 은행나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날리는 나뭇잎을 끌어안으며 쓸쓸히 앉아 있는 조그만 정자 옆에는 당산나무가 수백 년의 세월을 갈무리한 마을 숲에 자전거를 세우고 산을 오르다채 의연히 서 있다. 아직 낙엽 질 철은 아니건만 시간의 무게를 이기기 어려운 탓인지 땅으로 내려앉는 잎들이 보인다. 은행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운다. 매달고 온 지팡이를 빼어들고 논둑길을 걸어 산으로 향한다. 벼가 제법 고개를 숙이고 있다. 벼 베어낸 그루터기만이 을씨년스럽던 지난봄의 기억이 엊그제 일만 같은데, 그 논바닥이 어느 때는 모판이 되더니, 어느 때는 가녀린 모들이 종대 횡대를 잘 맞추어 논판을 수놓더니, 그리고 갈수록 푸른빛이 짙어지며 쑥쑥 자라더니, 이젠 푸른색이 옅어지면서 영근 이삭을 달고 서 있다. 벼가 달고 있는 것은 이삭만이 아니라 세월도 함께 달고 있다. 벼의 고개를 숙이게 한 것은 세월의 무게이리라.

산을 오른다. 소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생강나무 들이 어깨를 겯고, 머리를 맞대고 서 있다. 소나무만 푸른 잎을 달고 있을 뿐 모든 것이 앙상한 모습으로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생강나무는 남 먼저 노란 꽃을 피워내었지. 개울에 물 흐르는 소리가 나고, 싹이 나고, 움이 트고 하더니 산은 어느덧 녹음의 시절로 접어들었지. 어제만 해도 온통 푸른빛뿐만 같던 것이 오늘은 툭! 하고 열매를 떨어트린다. 도토리다. 길쭉하게 생기기도 하고, 동그랗게 생기기도 한 것이 반짝이는 윤기를 머금고 있다. 통통한 도토리 속살 속에도 세월이 맺혀 있으리라. 잎이 나고, 꽃이 피고, 꽃가루를 나누고, 깍정이 집을 짓고, 과피를 만들고 속살을 지어 지상으로 내려앉기까지 비와 바람과 햇살이 섞이어 흐르던 많은 시간들, 그 시간들을 먹고 도토리는 영글었으리라.

하늘인들 땅인들, 별인들 나문들, 사람인들 짐승인들 세월이 맺혀있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내가 이 한촌 벽지를 산 지도, 이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도 한 해 하고도 반이 더 넘었다. 두 해 째의 봄과 여름을 보내고 역시 두 번째의 가을을 맞고 있다. 이 산을 알고 난 뒤, 이 한촌을 벗어나지 않는 날은 비바람, 눈보라를 가리지 않고 하루도 거름 없이 올랐으니 줄잡아 삼백 날은 넘을 것 같다. 그 삼백 날의 발자국마다에도 쉼 없는 세월을 담아 왔다. 나무는 서 있는 자리만이 제 자린 줄 알고 선 자리에서 묵묵히 세월을 쌓아가고 있었지만, 사람의 일이란 참 무상하게도 변전해 갔다.

날마다 오르는 산, 그리고 나무들-. 나무는 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해가 바뀌면 나이테 하나 더 그어갈 뿐, 계절이 바뀌면 잎을 달거나 떨어뜨리기만 할 뿐, 거센 바람이 불어와 가지가 꺾여도, 뭇 새들이 날아와 품을 간질여도 나무는 그저 묵묵히, 오로지 그것만이 제 할 일인 것처럼 요지부동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한촌 벽지의 일일지언정 사람의 일이란 그리 간단치를 못했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살길 따라 떠나가고, 더러는 의지할 곳 찾아 이 산골짝으로 오기도 했다. 애틋하고 가슴 저린 사연을 안고 오고 가는 아이들도 없지 않았다. 꿈을 가지고 이 벽지를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다음 날의 꿈을 바라보거나 꿈을 접기도 하면서 떠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이해 관계를 따라 몸과 마음이 흩어지기도 하고 모이기도 하는 것이다.

세월을 본다. 서 있는 나무에서도,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서도 세월을 본다. 세월은 모든 것을 안고 흘러간다. 가는 세월을 보고만 있으랴. 나도 흘러서 간다. 어쩌면 세월이 나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도 나에게서 빠져나가고 있다. 누구에겐가 자리를 물려 주어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일터의 자리만이겠는가, 내 삶의 자리도 언젠가는 물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세월의 흐름이란 곧 주고받는 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의 되풀이인지도 모른다.

이 한촌을 떠나고 싶다. 산과 냇물이 아무리 좋은 들, 나무와 풀잎이 아무리 정겨운들 어찌 내 삶의 터만이랴. 사람이 아무리 정다운들 모두가 내 마음이라 할 수 있으랴. 흐르는 세월 따라 산도 나무도, 사람도 인심도 변해 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 변화 속에는 야속히 흘러가는 것도 있지만, 새 얼굴 새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도 있으리라. 새로운 만남을 찾아올 사람을 위해 떠나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만남을 향하여 떠나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세월과 만나고 싶다.

손녀가 태어났다. 듬직한 모습으로 태어난 손녀는 울음소리가 매우 크더라고 했다. 새 세월을 만드는 울림장일 것이다. 그 울음소리만큼이나 크고 슬기롭게 자라기를 빌어본다. 손녀에게서 세월을 본다. 새로운 세월과의 만남이다.♣(2006.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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