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일기

주지봉에 세운 빗돌 -마성일기·45

이청산 2007. 1. 23. 12:20

주지봉에 세운 빗돌
-마성일기·45



 ㅇ 주지봉 만나기

 

임지를 옮길 때마다 제일 먼저 하는 바깥의 일은 주민등록지를 옮기는 일이다. 임지는 곧 내 삶의 터, 그 터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역민이 되어 내 삶을 꾸려 나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일은 길 찾아 나서기다. 전입 신고만 마쳤다고 지역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디를 가려면 어디로 해서 가야한다는 것을, 어디에 가면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 지역을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나의 길 찾아 나서기는 또 하나의 까닭이 있다. 날마다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을 찾는 것이다. 산은 내게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활의 활력소이기 때문이다.

마성에 와서도 당연히 그런 일들을 해 나갔다. 부임을 하던 날 오후 면사무소로 달려가서 마성 사람이 됨을 신고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퇴근을 하고서는 길을 찾아 나섰다. 늘목, 가랫골, 구점, 연작살 마을을 걸었고, 저부실, 샘골, 오리골, 띠실, 솥골 마을을 찾아 헤맸다. 마성은 어룡산, 오정산, 단산, 봉명산 등 사방이 산이었다. 그러나 퇴근하고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걸음에 조금은 지칠 무렵의 5월 어느 날 작은 마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마을은 고속도로 아래의 굴다리를 통해 액자 속의 그림처럼 나에게로 다가 왔다. 굴다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니 냇물 위에 놓여진 작은 다리가 나타나고, 그 다리 너머로 나지막한 산자락에 안겨 있는 작은 마을이 보이는 것이다. 소야천 위에 놓인 다리 정현교, 그 건너 '정현마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이 마을 뒷산을 넘다보니 고개의 한 바위에 훌륭한 장수가 날 서기가 어려 있어 그곳에 못을 박에 혈(穴)을 찌른 곳이라 하여 못고개[釘峴]마을이라 했다는 지명 유래를 지니고 있는 마을이었다.

다리를 건너 그 마을로 들어서는 순간, 실로 감격적인 표지판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주지봉 입구 '라 쓰여져 있었다. 주지봉이라는 봉우리가 있다는 말이다. 몇 십 년 세월은 감겨 있을 듯한 상수리나무, 은행나무 숲 건너로 봉우리 하나가 보였다. 심장의 진동이 빨라지는 듯했다. 숲을 지나 주지봉 입구논두렁을 거쳐 산자락 밑에 서니 봇도랑 건너로 '주지봉 입구 367m'라는 안내판이 다시 보였다. 판자에 붓으로 쓴 것이었다. 입구를 들어서니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 어느 길로 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 더 넓어 보이는 왼쪽 길로 올랐다. 지난 겨울의 낙엽이 그대로 남아 있는 비탈길을 한참 올랐을 때 문득 무덤 하나가 나타나고, 마을이 보였다. 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이 아니었다. 내가 찾는 길은 마을로 가는 길이 아니라 봉우리를 향하는 길이다. 오르던 길을 되돌아 내려 왔을 때는 땅거미가 짙었다.

내일 퇴근 후에 다시 찾아보리라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지만, 마음은 그 길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밤을 자며 이튿날 종일토록 그 봉우리를 오르는 상상만 했다. 길은 얼마나 될까, 봉우리는 어떻게 생겼을까. 지난 두 달 여를 찾아 헤매던 산이 아니었던가. 드디어 날마다 오를 수 있는 산을 만나게 되려는가. 소풍을 앞둔 철부지 마냥 마음이 설레었다.

주지봉 가는 길퇴근 후 정현마을을 향하여 자전거를 달려 나아갔다. 은행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웠다. 그리고 주지봉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두 갈래 길, 어제 가지 않았던 길을 잡아 오르기 시작했다. 초입부터 매우 가팔랐다. 가풀막 곳곳에 횡목을 지른 계단길이 나타났다. 관(官)에서 한 일 같지는 않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닦은 길인 것 같았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주지봉을 사랑하는 어떤 마을 사람이 혼자 땀 흘리며 놓은 계단 길이었다. 백 수십 계단을 밟아 오르고 크고 작은 바위를 타고 오르니 조금은 평탄한 길이 나타났다. 평탄도 잠시뿐 코가 땅에 닿을 듯한 가풀막이 앞을 가로막았다. 미끄러지지 않게 용을 쓰며 오르다 보니 등판엔 어느새 땀이 젖어 왔다. 등성이 아래로 나 있는 고속도로에는 차량들이 쉴새 없이 한껏 속도를 돋우며 오가는데 가풀막을 오를수록 차들은 장난감처럼 작아져 가고 아득한 절벽 밑으로 강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마에 맺히는 땀을 씻으며 나뭇가지를 잡기도 하고, 무릎에 힘을 더해 가며 한참을 오르니 끝이 안 보이는 계단길이 문득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하나 둘 헤아려 올라가다가 보니 다리가 팍팍하고 숨결이 가빠졌다. 백 일흔 하나, 백 일흔 둘, 그 계단은 백 일흔 셋에서 끝났다. 그 이후 나는 그 계단을 '173계단'이라 불렀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풀막을 에돌아 조금 더 오르니 다시 서른 아홉 계단, 열 계단이 더 나타났다. 어쩌면 내 살아온 길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73계단'까지가 마성에 오기 전까지의 내 삶의 길, 지난(至難)했던 길이었다. 마지막 '173계단'을 오르기가 무척 힘이 들었듯이 마성으로 오기까지 쉽지 않게 걸어온 삶의 길들이 돌아 보였다. 걸어야 할 길은 끝나지 않았다. 그 힘든 '173계단' 위에 또 계단길이 있듯이.

마지막 열 계단을 올랐을 때 주지봉, 그 봉우리는 거기에 있었다. 세상의 모든 산을 다 거느리고 있었다. 어룡산도, 오정산도, 봉명산도, 백화산도, 저 아련한 주흘산도 다 거느리고 있었다. 마성의 마을을, 들판을, 강을, 그리고 차들이 질주하는 고속도로를 거느리고 거기에 있었다. 주지봉은 평화였다. 저 마을 속의 희노애락도, 저 들판의 고단한 노동도, 저 강물의 돌고 도는 굽이도, 고속도로가 내뿜는 소란한 기계음도 모두가 평화로 용해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주지봉의 품안으로 안겨 들고 있었다. 강이 흐르는 들판 머리에, 산의 자락 자락에 오순도순 모여 있는 집들이 새근새근 잠든 아기 모습처럼 한 점 티도 없는 평화로 가득해 보였다. 봉우리 아래 펼쳐진 세상을 보고 있는 사이에 머리속도 가슴속도 다 비워지고 편안(便安)과 정밀(靜謐)만으로 한껏 채워지는 것 같았다.

 

 

ㅇ 주지봉 오르기

 

그 날 이후 해거름이면 언제나 자전거를 달려나갔다. 연작살을 지나 소야천 둑을 달리고 정현교를 건너 마을공원 숲에 멈춰 섰다. 여러 가지 일과 사정으로 인해 마성을 벗어나야 하는 날이 없지 않았다. 그 또한 내 삶이니까. 그러나 마성에 발을 딛고 있는 날은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달이 겨울 주지봉 오르는 길지나고 해가 바뀌는 시간들이 흘러가는 사이에 자전거의 타이어도 닳아갔고, 마침내 타이어 하나를 새것으로 갈아 끼워야 했다. 그렇게 하루도 쉬지 않고 자전거를 달렸듯이,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주지봉을 올랐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오르고, 비가 오면 우장을 쓰고 오르고, 눈이 오면 아이젠을 신고 올랐다.

돌이켜 보면 내 산 오르기란 건강의 도모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지만, 주지봉 오르기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풀막을 숨 가삐 오를 때 온몸을 적셔오는 땀의 상쾌함이 즐겁기도 했지만, 일과를 끝낸 시간에 오른 봉우리에서 느끼는 세상의 평화로 일과가 남긴 마음속의 찌꺼기를 씻어 낼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유쾌한 일이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오르는 사이에 주지봉 오르기는 어느덧 나의 '마성 사랑법'으로 변해 갔다. 주지봉 앞으로 펼쳐지는 마성의 평화, 그것은 내 마음 속에 하나의 그리움으로 자리 잡아 갔다. 어쩌다 다른 일이 있어 주봉을 오르지 못하는 날이면 주지봉 그 봉우리, 그리고 주지봉이 보여주던 마성 풍경이 머리 속에 그려지며 그리움이 되어 떠오르는 것이다. 또 어찌한 볼일 때문에 오르지 못하는 날이 거듭되면, 그만큼 그리움의 농도도 짙어 가는 것이다. 마성에 있으면서도 주지봉에 오르지 않기란 나에게 있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토록 오르기를 마다하지 않은 주지봉, 과연 몇 번이나 올랐을까. 만추의 낙엽이 주지봉을 덮던 어느 날 문득 그 오른 횟수가 궁금해졌다. 사랑을 횟수로 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사랑의 이력을 한번 짚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십 년 넘게 써 온 나의 일기장이 이백 여든 몇 번의 횟수를 간직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삼백 번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근 이태 동안 마성에 몸을 두고 있은 날치고 하루도 안 빠지고 올랐던 주지봉, 그 등성이에 찍은 삼백 번 발자취를 무엇으로든 기념해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주지봉'이라 부르기는 하되, 그 이름을 새긴 표지석 하나 없음이 생각났다. 내 삼백의 발자국을 기념하여 그 이름표를 하나 달아 주리라. 마을에 어떤 분이 주지봉을 사랑하여 수많은 횡목을 놓아 길을 닦고 돌을 모아 봉우리에 탑을 하나 세웠다. 그 역사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 또한 주지봉을 사랑해 날마다 오른 것이거늘, 그 사랑의 정표를 하나쯤 남기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 생각만 했을 뿐, 꼭 그리 하겠다는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조경업을 하고 있는 우리 학교 김현수 운영위원장을 만나 이런저런 환담을 나누다가, 내가 삼백 번 가까이 주지봉을 올랐다는 것과 주지봉에 여태껏 표지석이 없는 것이 아쉽다는 것이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평생을 마성에서 살아도 그토록 많이 오른 사람은 없을 것인데, 내가 삼백 번 가까이나 오른 것은 지역을 위해서도 크게 기념할 만한 사실이라며 기뻐했다. 이 김 위원장은 평소 학교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 발전을 위해서도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는 분이다. 어느 날 김 위원장은 큼직한 돌을 하나 구해 왔다. 나의 삼백 회 등정을 기념하여 '朱芝峰'이라 커다랗게 새겨 빗돌을 세우자고 했다. 고마울 따름이었다. 표지석을 세우고 싶은 나의 막연한 생각이 현실로 다가서고 있었다. 내가 삼백 번째 주지봉을 오르게 되는 날, 함께 올라 빗돌을 세우기로 했다.

 

 

ㅇ 빗돌 세우기

 

2006년 12월 30일, 삼백 번째 주지봉을 오르는 날이다.

며칠 맹위를 떨치던 추위도 숙지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로 화사한 햇살이 피어났다. 약간의 과일과 떡과 술을 준비했다. 주지봉 아래에서 양어장을 하고 있는 정대모 운영위원 집에 모두 모였다. 빗돌을 준비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물론, 주지봉 봉우리 위에까지 가져가서 세우는데 힘을 모을 분들도 김 위원장께서 다 불러 놓았다. 운영위원 네 분에 동반한 두 부인, 동창회원 네 분 등 모두 열 사람이었다.

빗돌을 지고 주지봉으로작은 손수레에 돌을 싣고, 시멘트며 물 등 기초를 다질 재료들을 나누어 등에 졌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평소에 내가 다니던 길은 너무 가팔라 덜 가파른 주지봉 뒷길로 올랐다. 수레로 옮기던 빗돌은 가풀막에 이르러서는 단가에 옮겨 싣고 네 사람이 들었다. 좁다랗게 경사진 등산로를 보조를 맞추며 오르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어찌 힘들지 않으랴. 그러나 그 힘듦을 수고롭게 생각하는 사람 없이 들고 끌고 지기를 거듭하며 봉우리를 향해 올라갔다. 땀을 닦으며 쉬기도 하며, 유쾌한 농담으로 힘듦을 잊어 가며 봉우리에 도착한 것은 한 시간 여를 빗돌과 씨름한 뒤였다.

평화로운 마성의 풍경이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 땅을 팠다. 빗돌 세우기돌과 시멘트를 섞어 넣고 기초를 다졌다. 그리고 빗돌을 들어 앞면을 동쪽으로 향하게 하여 반듯이 세웠다. 그리고 빗돌 주위의 흙을 다져 밟았다. 시맨트를 개고 남은 물을 빗돌에 부어 깨끗하게 씻었다.

빗돌 앞에 과일과 떡과 포를 차렸다. 그리고 빗돌을 향해, 아니 주지봉을 향해, 마성을 향해 재배하며 축원을 올렸다.세워진 빗돌

"천지신명이시여! 우리 삶의 터 마성을 더욱 번성하게 해 주시고, 이 주지봉을 더욱 푸르고 높게 해 주소서……!" 그리고 술잔을 들어 빗돌에 부었다.

김 위원장을 비롯한 몇 분들이 역시 축수의 잔을 올리고, 모두 함께 모여 서서, 마성의 번성과 주지봉이 번성하는 마성의 상징이 되기를 축원하는 만세 삼창을 불렀다. 붉은 지초(朱芝) 아름답게 피는 주지봉이 되기를, 누대(累代) 창창 번성하는 마성이 되기를!세우고 난 뒤의 만세 삼창

"…저의 뜻을 곱게 살펴 주시고, 함께 마음과 힘을 모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주지봉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표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표지석으로 마성과 주지봉은 저의 잊지 못할 또 하나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도 마성과 주지봉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모두들 박수를 쳤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산을 내려 왔다.

 주지봉은 비로소 그 이름을 달게 되었다. 내 마음속에도 그 이름은 더욱 주지봉 세우기에 히믈 합친 분들과 함께뚜렷이 새겨졌다. 내 마음에 새겨진 '朱芝峰' 그 이름 속에는 나와 한 마음이 되어 빗돌 세우기의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던 분들의 이름도 함께 남았다.

김현수 씨 부부, 정대모 씨 부부, 박상동 씨, 신상렬 씨, 백영수 씨, 정석화 씨, 김효숙 씨, 김경범 씨. 더불어 살았던 고향의 사람이 되어 남을 이름들이다.

주지봉에 빗돌 속에 남은 이름들이다.

마성 벌에 평화를 새길 이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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