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세월의 자국을 넘어서

이청산 2024. 10. 13. 12:03

세월의 자국을 넘어서

 

  커다란 거울이 터미널 화장실 입구 옆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화장실을 가도 무심히 그냥 지나칠 수도 있고, 차에 오를 시각이 임박하여 급히 가다 보면 눈 돌릴 겨를이 없어 거울을 지나치기도 한다.

  어느 날 차 탈 대비로 화장실을 들면서 우연히 거울 쪽을 곁눈질하게 되었다. 허리 구부정한 웬 늙은이 하나가 중절모를 쓰고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싶어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나였다.

  낯선 모습이다. 내 언제 저리 허리가 굽어졌으며, 모자 아래로 드러나 있는 머리카락은 왜 저리 허옇게 보이는가. 집에서 반듯하게 서서 거울을 볼 때와는 영 딴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런 모습이 되어 있었구나.

  점점 늙어가는 줄이야 모를 리 없다. 기력도 날로 여려지는 것 같고, 몸 기능들도 제 노릇 해내기에 조금씩 힘들어한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볕 쨍쨍한 한낮보다, 불그레하게 물들어가는 석양이 더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마음도 늙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내 늙은 모습이 저런 모습일 줄이야. 허리가 좀 쑤실 때가 있긴 해도 걸을 때는 바로 설 수 있다고 여겼었다. 아니, 별생각이 없이 서 있거나 걷곤 했다는 게 옳은 말일 것 같다. 어찌하였건 저런 모습이 내 모습일 줄은 몰랐다.

  무엇이 나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그렇지, 그것이 그랬구나. 그것이 저리 해찰을 부렸구나. 세월이다. 세월이란 무심히 흘러가는 것 같지만 강물처럼 유유하고 유장하게 흘러가지는 않는 것 같다. 제 자국을 꼭 남긴다.

  물론 세월은 사람에게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나무며 풀이며 꽃이며 길짐승, 날짐승이며 미물에게까지도 다 흘러간다. 그 방법도 껴안든지 무얼 잡아끌든지 채찍질하든지 때에 따라 대상에 따라 다 다른 흔적을 남기며 흘러갈 수 있다.

  나의 세월은 나를 어떻게 채근해 왔던가. 돌아볼수록 나에게는 별로 살갑거나 자비롭게 대해 준 것 같지는 않다. 내 탓이 클 것이다. 내가 세월과 잘 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제 할 탓’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찌하였든 나의 세월이란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거나, 다정히 손을 잡아주기보다는 나를 떠밀려 했고, 힐책하려 했고, 그러다가 자빠지게도 하고, 그래서 몸과 마음에 생채기를 남겨주기도 하면서 나를 살아오게 한 것 같다.

  나에겐들 아늑하고 온기 어린 세월이 왜 없었을까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혹은 맑은 물은 흘러가고 자갈만 강에 처져 남듯 그런 기억은 묻히거나 흘러가 버리고 세월의 상반傷瘢들만 남이 있는 것 같아 사는 일이 허허로워지기도 한다.

  그뿐이랴, 그 세월의 뒷자락에 나에게 남은 일은 사람이든 무엇이든 모두 나에게서 떠나갈 일밖에 없는 것 같다. 주위 사람들도 이미 떠났거나 떠나려 하고 있고, 내 몸도 나에게서 조금씩 떠나고 있다. 내 손때 묻은 것들도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돌아보면 허전하고, 둘러보면 뭔가 자꾸 비어가는 것 같아 고적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고적의 끝자락엔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를 돌아보는 순간, 체념이랄지 항심抗心이랄지 상념의 반전이 불현듯 일기도 한다. 다 빌 때까지 그냥 살아보자고-.

  ‘인디언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법’에 이런 말이 나오는 걸 봤다.

  “한 번에 하루 치의 삶을 살라. 그럼으로써 모든 날을 잘 쓰라. 정성을 다해 채소를 기르듯 영적인 밭을 일구라.”

  그래, 하루 치씩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다. 지난날이야 어찌할 수도 없고, 오지 않는 날이야 어차피 나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냥 하루하루를 사는 거다. 채소를 가꾸듯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영적인 밭도 일구어져 가겠지.

  지금 내 몸과 마음에는 수많은 세월의 자국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 구부정해진 허리도 물론 그 자국에 하나일 것이다. 이 굽은 허리가 지금까지 나를 살려온지도 모르겠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내게 찍혀 있는 모든 세월의 자국들과 함께.

  내 살아가는 하루하루에도 또 자국이 남아 가게 될 것이다. 그 자국을 더는 남길 자리가 없게 될 때가 내 세상이 끝나는 날일 것이다. 남겨지는 데까지 남겨보자. 그 자국들이 내 영혼의 밭을 더욱 걸게 해줄지 아는가.

  오늘 하루도 그렇게 살아보자. 구부정한 허리 거울을 뒤로하고, 세월의 자국을 딛고 넘어서 차를 오른다. 언제 보아도 기쁘고 즐거운 사람들을 만나러 갈 차다. 

 삽상하게 내딛고 싶은 걸음으로 오른다. ♣ (202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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