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댑싸리 전설(2)

이청산 2024. 10. 27. 11:35

댑싸리 전설(2)

 

  댑싸리는 올가을에도 더는 붉을 수 없을 것 같은 짙붉은 물이 들었다. 아내는 올해도 그 붉은빛을 볼 수가 없다. 그런 채로 저 붉은빛은 씨를 남기면서 하얗게 바래 갈 것이다.

  지난해 초여름 가료를 위해 아이들 집에 가 있던 아내가 당부한 말을 따라 그렇게 심었던 대로 올 초여름에도 어린 댑싸리를 문간 어름에 한 줄로 나란히 심었다. 그 댑싸리가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흘러가는 사이에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빛을 바꾸어 가며 무럭무럭 자라다가 이제 그 푸른 고비도 넘어 새빨갛게 물이 들었다.

  아내는 자기가 씨 뿌려서 난 모종을 한 줄로 보기 좋게 심어 달라 해놓고 초록으로 제법 북슬북슬한 자태를 이룬 한여름 어느 날, 그 모습을 영영 볼 수 없는 나라로 가버렸다. 지금처럼 가을이 이슥해져 그 붉게 타는 모습을 나 혼자 보아야만 했다. 그 빛깔은 내 안으로 들어와 타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서만 댑싸리를 지켜보며 지내던 작년 어느 겨울날, 그 댑싸리가 한살이를 마치고 씨를 흩뿌리고 거두어질 무렵이었다. 오직 혼자뿐인 방안에서 쓰러진 채 잠시 내 생애에서 완전히 지워진 혼절의 시간을 맞아야 했다. 119에 겨우 실려 어느 병원 응급실로 갔다가 아이들이 사는 대처의 큰 병원에 누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19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전화번호를 보고 위치 추적을 할 수 없었다면, 어느 땐가 백골이 되어서야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었었다.

  진단 결과는 체내에 있어야 할 무슨 무슨 요소가 결핍되어 쓰러지면서 그 충격으로 척추 한 부분에 골절이 났다는 것이다. 그 댑싸리를 홀로 보면서 지내온 시간들이 내 몸에 해찰을 부린 모양이었다. 평생 처음 홀로된 삶을 겪다 보니 그 시간들이 나를 만만하게 본 것 같다. 두어 주일 후에 온전치 못한 육신을 끌고 겨우 집으로 돌아왔지만, 나에게 안긴 건 이지러져 가는 몸과 빈방뿐이었다.

막막하고 캄캄했다. 절대 희망도 없듯 절대 절망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나라에서 알고 내 생애를 도와줄 사람을 보내주었다. 나에게로 온 그 사람은 나라에서 보내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보내준 사람 같았다. 먹고 입고 치유하며 지내야 하는 몸뿐만 아니라 의지하고 위안받고 싶은 마음까지도 채워주기에 애썼다.

  그런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모든 것 속에 댑싸리 파란 싹도 앙증맞은 얼굴을 내밀었다. 저들이 돋아나기를 바라며 씨를 뿌린 적도 없건만, 겨울 들머리에서 마른 것들이 남기고 간 씨앗에서 돋아난 것이다. 아내가 몰래 와서 뿌리고 간 것 같기도 했다. 그때도 아내는 나에게 말도 없이 씨를 뿌렸었다.

  그래, 그 씨 뿌려놓고 간 아내가 저들 솟은 것을 솎아 한 줄로 심어 달라고 했지. 아내 말대로 한 줄로 옮겨 심었지. 그 봄이 흘러갔다. 댑싸리는 내 속을 알고 있기라고 하는 듯 잘 자라 주었다. 그중에는 자리기를 꾸물대는 것도 있었지만, 다들 아내가 기대했을 복슬복슬 탐스러운 모습으로 자라 주었다.

  “저것 좀 봐요, 참 이쁘지 않아요?”

  아내가 아닌, 내 생애를 도와주는 분에게 말했다.

  “그러네요.”

  짧은 말을 했다. 그는 알 리가 없다. 저걸 내가 왜 한 줄로 저렇게 심었는지를. 내가 왜 이쁘다고 하는지를-. 조금은 쓸쓸한 심사가 속을 쓸어내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는 내가 세상을 견뎌 나가는 일을 위해서 스스로 할 일을 찾아 성심을 다해주고 있는 분이다.

점점 더 복스러워지면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크기는 달라도 자랄 대로 다 자란 것 같다. 가을 소슬한 바람에 흔들리면서 푸른빛이 붉은빛으로 바뀌어 갔다. 어느새 온통 붉은빛이 되었다. 아내가 씨를 뿌려놓고, 그 싹을 집 문간 고샅에 그렇게 옮겨 심으라 해놓고 자기는 못 보았던 빛깔이다.

  지난겨울에 얻은 병의 뒤가 아직도 남아, 병원 길을 나서던 날에도 댑싸리는 붉게 타고 있었다.

  도와주는 분은 내 길 채비를 함께해 주면서 문간 배웅을 나왔다.

  “빛깔이 참 곱지요?”

  “불타는 것 같네요.”

  “내 년에도 또 저렇게 가꾸어야겠어요.”

  내 속도 타오르는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잘 다녀오시라며 손을 흔들었다.

  아내가 못 본 것까지 내가 보고 보리라 속을 여미며 병원 길 차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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