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이 드니 참 좋다

이청산 2023. 6. 10. 14:50

나이 드니 참 좋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날이 오르는 산이지만 빛깔이며 모습은 한결같은 날이 없다.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 푸나무의 크기라든지, 나뭇잎 빛깔이라든지, 꽃이 피고 지는 거라든지, 열매가 맺고 떨어지는 거라든지 하루도 그 모양 그대로 있지 않다.

  시간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이 나무, 이 산빛에서 시간을 본다. 흘러가고 있는 시간의 얼굴이며 몸체를 본다. 맨살의 가지에서 꽃이 피고 잎이 나고 꽃이 지고 잎이 자라고 잎의 빛깔이 달라지다 내려앉고, 열매가 맺었다가 떨어지는 모습들 속을 시간이 흐르고 있다.

  저들이 저리 변해 가는데, 나는 가만히 있는가. 아니다. 저들이 시간을 안고 변모를 거듭해 가듯 나도 나날이 달라져 간다. 나무가 나이테를 더해가는 것처럼, 나도 하루 이틀 시간을 더해가고 한 해 두 해 나이를 더해가고 있다.

  저 잎이며 꽃들에게 흐르는 시간은 어떤 것일까. 나에게 하루하루 더해지는 시간들은 참으로 아늑하다. 그 덕분에 노도의 시간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격정으로 끓게 했던 삶의 함정에서도 헤쳐나올 수 있지 않았는가.

  그때는 그리해야 하는 줄 알았다. 분노해야 하고 투쟁해야 하는 줄 알았다. 세월이 흘러가자 봄날의 눈발처럼 나도 모르게 잦아드는 것들이었다. 그 잦아든 자리에 고이는 것은 평온이 아니었던가. 돌이켜보면 모두가 시행착오요, 욕심의 덩어리들이었던 것을.

  그런 것들이야 혈기 방장할 때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내 어깨에 등에 걸고 짊고 있던 짐들도 하나둘씩 내려져 갔다. 무엇이 그렇게 한 것인가. 나를 그렇게 평온으로 주저앉히고 있는 힘이 나이라는 시간의 선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 나는 생애 최대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앞으로 나에게 어떤 자유가 더 주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자유는 지금 삶에도 죽음에도 별로 구애받고 싶지 않은 데까지 와 있다. 아무리 백세시대라지만 망팔쇠년도 한참을 지난 시간 속을 살고 있음에야 적잖이 살지 않았는가.

  유엔이 정한 연령 기준*에 의하면 아직 나는 중년(middle-aged)이라 할 수 있지만, 노년(senior)이 그리 멀지만도 않다. 이쯤이면 삶에 그리 욕심내지 않아도 될 것 같지 않은가. 설령 지금 좀 욕심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나달이 가는 사이에 사그라들 욕심 아닌가.

  당해 봐야 알 일이라 하더라도, 나에게 난치병 불치병이라도 와서 말기적 증세가 나를 거두려 한다면, 곱게 내 숨줄을 내어주고 싶다. 그래서 수년 전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것도 국립 기관에 등록해 놓고 있는 터다.

  다만, 나를 돌보는 이에게 빌고 싶은 게 있다면 진통제는 좀 고급으로 써 달라는 거다. 어느 명사, 어떤 예인의 마지막처럼 할 일, 즐길 일 다 치른 이튿날 아침, 밤잠 이어가듯 곱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게 아니면 의약의 힘을 빌려서라도 편안히 가고 싶은 게 내 마지막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마치 탈속이라 한 듯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여윳돈이 있으면 적금이라도 조금 들고 싶다. 세상의 명암을 달리하는 그 순간까지 주머니가 비어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계 관리나 부의 축적을 위해서가 아니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다. 하릴없이 폐를 남기게 될지라도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다. 내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나를 거두어야 할 이는 물론 나의 붙이들이겠지만, 살아오면서 잘해준 것도 없는 그들에게 내 행보의 짐을 어찌 고스란히 지울 것인가.

  또 하나 버리지 못할 욕심이 있다면, 반평생 남아 글을 써왔다 하면서도 이렇다 할 글 한 편 제대로 못 남겨 온 것 같다. 숨줄을 저세상에 얹을 때까지라도 마음에 드는 글 하나 쓰고 가고 싶다. 세상에 남겨지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내 희열을 얻고 싶어서일 뿐이다.

  이렇듯 정리하지 못한 욕심도 있지만, 다른 일에는 별로 큰 미련이나 집착이 없다. 나는 지금 어깨도 가슴도 참 가볍다. 이 가벼움은 무엇이 가져다준 것인가. 그게 바로 나이가 아니던가. 박경리 소설가가 운명하기 몇 달 전에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옛날의 그집)라 쓴 시구가 공연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

  나에게 주어진 세상이 다하는 날까지는 나는 계속 나이가 들어갈 것이다. 점점 홀가분해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홀가분해지다 보면 어느 날엔가 날개가 솟아 푸른 하늘 속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 노래하는 푸른 시간의 얼굴을 보며 가벼운 걸음으로 산을 내린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참 좋다.♣(2023.6.4.)

 

 

*UN이 정한 평생 연령 기준

1) 미성년자(underage) : 0 ~ 17, 2) 청년(youth) : 18 ~ 65, 3) 중년(middle-aged) : 66 ~ 79, 4) 노년(senior) : 80 ~ 99, 5) 장수 노인(longlived elderly) : 100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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