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남은 잔은 비우고 가세

이청산 2023. 5. 28. 13:50

남은 잔은 비우고 가세

 

  아침이 참 눈치 없다. 원하는 사람이든 원치 않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찾아온다. 아침은 정녕 그런 분별을 못 하는 걸까. 기다리는 사람에겐 기꺼이 와주고, 기다리지 않은 사람에겐 슬쩍 비켜 가 주는 체면은 없는 걸까.

  세상은 꽃밭 천지만도 아니고 가시밭 천지만도 아니다. 꽃밭이다가도 문득 가시밭이 다가서 오기도 하고, 가시밭인가 싶더니 저 너머에 꽃밭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웃는 것이 삶이라 했던가.

  꽃밭을 살 때는 내일이면 또 어떤 꽃이 필까 싶어 밝은 아침이 어서 오기를 설렘으로 바라기도 하겠지만, 가시밭만 이어진다 싶을 때는 아침이 나의 것이 되지 않기를, 그래서 고난의 한세상이 다른 세상으로 바뀌어주기를 간곡히 비는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아침은 꽃밭 속을 사는 사람이고, 가시밭을 헤매는 사람이고를 가리지 않는다. 무지막지하게 온다. 꽃밭을 사는 사람이라고 더 고운 햇살을 뿌려주지도 않고 가시밭에서 신음하는 사람이라고 포근한 햇볕을 내려 쓰다듬어 주지도 않는다.

  아침은 제 맘대로 와서는 제 할 짓 다 하고서 제 신명대로 떠나버린다. 익은 햇살로 세상을 내리쬐면서 한참 천지를 가지고 놀다가 짙붉은 노을이나 남겨 놓고,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이야 무얼 어떻게 여기든 훌쩍 떠나가 버리곤 한다.

  그 사이에 가시밭길을 가던 사람이 꽃밭으로 들어서게 되기도 하고, 꽃밭이 가시밭으로 뒤집혀 쑥대밭이 되기도 한다. 아침이 가져온 일들일까.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무엇을 뒤집어 바꿀 능력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아니,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침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기쁠 때도 오고 슬플 때도 온다. 내 심사하고는 아무런 상관 없이 밝고 맑은 햇살을 가져오기도 하고, 잔뜩 찌푸린 상판으로 내리기도 하고, 청승맞은 눈물을 흘리며 다가서기도 한다. 그것은 저를 바라는 이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내가 환희로울 때 밝은 얼굴로 찾아와 흥에 겨운 춤이라도 춰 주면 좋겠지. 그렇지만, 내가 쉬어 가고 싶을 때 슬쩍 좀 물러나 주고, 내가 우울할 때 같이 좀 울어도 주고, 그것은 그런 기미를 전혀 차릴 줄 모른다.

  살다 보면 환히 밝은 세상에서 넓게 편 가슴으로 청량한 하늘 정기를 받게 해주기를 바라고 싶을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제발 나를 찾아오지 말고 이 밤 이 잠 이대로 영원히 두어 주기를 바라고 싶을 때도 없지 않다.

  그래, 필요한 사람한테나 실컷 찾아가 주고, 그래서 희망도 주고 위무도 해주고 하지, 왜 바라지 않는 사람한테 구태여 찾아와 이 하루를 또 고달피 살게 만드는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다. 편안하게 평화롭게 잘 살게 만들지도 못하면서 왜 꾸역꾸역 찾아오는가.

  실없이 찾아와 하루를 또 살게 만든다. 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찾아올지 몰라도 저 때문에 또 하루를 겨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들이 있다는 걸 도무지 헤아리지 않는다. 헤아리고, 않고 하는 그런 뜻을 전혀 갖고 있지도 않은 것 같다.

  이젠 나도 지쳤다. 나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저를 바라서 무얼 어찌하랴. 나도 저를 잊어버리거나 무시해 버리는 수밖에 없다. 저야 오든 가든 내가 눕고 싶을 때 눕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주저앉고 싶을 때는 주저앉고-.

  아침아, 네가 나를 모르는 체하는데, 난들 너를 알아 무엇하랴. 마음대로 오고 가거라. 나도 너랑 상관없이 가고 오련다. 살고 싶을 때 살고, 쉬고 싶을 때 쉬련다. 그런 상념 속을 비집고 이런 노래가 왜 폐부를 파고드는 걸까.

  “늙은 산 노을 업고 힘들어하네 / 벌겋게 힘들어하네 / 세월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 조각 / 하얀 구름 한 조각 / 여보게 우리 쉬었다 가세 / 남은 잔은 비우고 가세”(나훈아, 「세월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 조각」)

  노래 한 곡이 눈치 없는 너보다 훨씬 낫다. 아무런 생각 없이 와 놓고는, 그래서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들어 놓고는, 또 아무 거리낌 없이 가버리는 너보다는 이 노래 한 곡이 오히려 아늑한 위안거리다. 너보다 세월을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 조각이 훨씬 고즈넉하다.

  노래는 또 이렇게 이어진다.

  “가면 어때 저 세월 / 가면 어때 이 청춘 / 저녁 걸린 뒷마당에 쉬었다 가세 / 여보게 쉬었다 가세”

그 쉼이란 잠시라도 좋고 영원이라도 좋다. 너야 마음대로 오고 가거라. 이 노래는 위안이라도 주고 있지 않은가. 아침아, 너는 무엇을 할 줄 아느냐?. 기쁨에 찬 사람에게 희열을 주어봤느냐?. 고뇌에 겨운 이에게 술 한잔 권해 봤느냐?.

  너와는 모른 체하고 살련다. 그냥 살련다. 억지로 하려는 일도 없이, 안 하는 일도 없이 그냥 살면서 남은 잔이나 비우고 가련다. 야속한 아침아-.♣(202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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