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춘서春序

이청산 2023. 5. 12. 09:33

춘서春序

 

  다른 나무는 한 달 전쯤에 꽃을 다 내려 앉히고 잎이 돋기 시작하여 벌써 무성한 녹음을 이루고 있는데, 아직도 꽃을 피워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벚나무가 있다. 그 나무 앞에 서면 꽃을 피워내기 위해 용을 쓰는 소리가 쟁쟁히 들릴 것도 같다.

  강둑에 줄지어 선 벚나무는 마을의 큰 자랑거리다. 봄이 오면 어느 나무 할 것 없이 일매지게 꽃을 터뜨려 화사하고도 해사한 꽃 천지를 이룬다. 작년부터는 나무 아래 조명등을 설치하여 꽃이 피어 있는 동안은 밤낮으로 화려한 꽃 잔치를 벌인다.

  꽃잎이 지고도 붉은색 꽃받침이 남아 또 한 번 꽃을 피우듯 온통 붉은 꽃 세상이 된다. 강둑을 다시 장식하면서 강물에 꽃 그림자를 드리운다. 꽃받침이 떨어진 자리에 뾰족뾰족 잎눈을 틔우다가 이내 풋풋하고 싱그러운 푸른 잎 세상을 만든다.

  그렇게 다른 나무는 신록을 자랑하는 시절을 누리고 있음에도 아직 꽃을 피우고 있는 저 나무-. 둑을 새로 쌓는 공사를 하고 난 빈자리에 지난해 가을 새로 심은 어린나무 중 한 그루다. 이 애송이 나무들도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잎을 돋우어 낼까.

  봄이 왔다. 피우고 돋우어 냈다. 앙증맞은 꽃을 피워내고 꽃 지자 연록의 잎들을 솟구쳐냈다. 그런데 유독 한 그루만 봄을 까마득히 잊은 듯 꽃이며 잎 소식이 감감하다. 옆 나무는 벌써 푸른 잎이 돋고 있는데-. 뿌리를 내리지 못해 명을 거두어버린 것일까.

  어라! 딴 나무 꽃들이 다 지고 난 두어 주일쯤 지난 뒤, 망울이 한두 개씩 부푸는가 싶더니 그 망울에서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피워내는 것이 아니라 날을 두고 이 가지 저 가지에 한두 송이씩 어렵게 피워내는 것이다.

  아무리 더디더라도, 철모르고 늦더라도 기어이 꽃을 피워내고야 말겠다는 듯, 다른 나무야 녹음이 우거지든 어쨌든 꽃을 먼저 피워내고서야 잎을 돋우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이는 듯도 했다. 그것이 제가 지킬 질서라는 듯, 보고 있노라면 비장미가 솟기도 했다.

  ‘춘서春序라는 말이 있다. 봄을 맞아 여러 가지 꽃이 차례로 피어나는 걸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십사번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이라는 말도 있다. 소한에서 곡우까지 이십사후二十四候 사이에 닷새마다 새로운 꽃이 피는 것을 알려 주는 봄바람이라는 뜻이다.

  봄이 되면 모든 꽃이 일제히 피어나는 듯하지만, “봄기운에 정원의 매화가 가장 먼저 피어나고, 뒤이어 앵두, 살구, 복사꽃, 오얏꽃이 차례로 핀다. 春風先發苑中梅 櫻杏挑李次第開”(白樂天, 「春風」)라 하듯 피는 데도, 이렇듯 춘서가 있는 것이다.

  봄이 오면 나무류에 따라 어떤 것은 꽃을 먼저 피운 후에 잎을 돋우어 내고, 또 어떤 것은 피워 낸 잎 사이로 꽃을 돋우어 내는 저마다의 질서를 가지고 있다. 봄을 서둘러 피는 것일수록 꽃을 먼저 피워낸다. 이것도 모두 저들의 생리요, 춘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봄의 이런 질서가 자꾸 문란해지고 있다. 철없이 꽃들이 피어나기도 하고, 차례 없이 여러 꽃이 한꺼번에 피었다가 지기도 한다. 4월 초순을 넘어서서 피던 마을 강둑의 벚꽃도 해마다 꽃 피는 시기를 조금씩 앞당기는가 싶더니 올해는 3월 말에 피워냈다.

  지금은 마치 성하盛夏라도 된 듯 무성한 녹음이 어우러지고 있다. 그런데도 저 나무는 지금 한창 꽃을 피워내려고 애쓰고 있다. 어차피 꽃 철은 지났으니 다른 나무들처럼 잎 먼저 피워내어 그 수액을 갈무리했다가 내년에 제대로 된 순서를 찾으면 되지 않을까.

  그게 안 되는 모양이다. 미련하다 할까, 우직하다 할까. 지켜야 할 차례는 기어이 지켜내야 하는 모양이다. 그게 저의 생체적 질서라 믿는 것 같다. 정직하다 할까, 순진하다 할까. 차례를 모르고 사는 이들을 보면, 저가 오히려 미련하고 부정하다 할지 모를 일이다.

  세상에는 질서를 짓이기고 사는 미련이며 부정이 얼마나 횡행하고 있는가. 오직 저만의 안일과 안전을 위하여 법질서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저들만의 이해타산을 위하여 오직 저들만을 위한 법을 만들어내어 세상을 농락하는 군상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 않은가.

  ‘춘서春序가 무너지고 있는 건 지구온난화 현상 등의 이상 기후 탓이라 한다. 그런 현상이 모두 사람 탓이 크다 한다. 이렇듯 질서가 무너져 가다 보면, 세상에 어떤 재앙으로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제 몸을 제가 옥죄고 있는 격이다.

  오직 제 한 몸 보전을 위해, 정파 이득만을 위해 세상을 쥐락펴락하다 보면, 그래서 질서고 법이고 저들 편리한 대로만 탐하다 보면 큰 화가 되어 세상을 나락에 빠뜨리지 않을지 모르겠다. 제 무덤과 함께 애먼 무덤까지 파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강둑을 걸으며 저 우직한 벚나무를 다시 본다. 옮겨온 뿌리를 낯선 땅에서 거두기가 버거워 올해는 꽃 피우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다른 것들보다 살이를 조금 느리게 가꾸어 가고 있을지라도 기어이 꽃을 피워내면서 제 활기를 찾고 있다.

  그 순리를 몰각했다면 뿌리조차 내리뻗을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힘을 얻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 제 사는 방도를 터득해 내었을 것이다. 올해 잘 지킨 춘서며 저 순리의 질서가 힘이 되어 내년엔 제때 제 절기에 화사한 꽃을 피우고 푸르른 잎을 돋우어 낼 것이다.

  저 모습에서 다른 것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활짝 피워내고 푸르게 돋우어 낼 내일의 풋풋한 얼굴을 본다. 새 세상을 본다. ♣(20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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