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음덕

이청산 2023. 4. 23. 14:49

음덕

 

  집안 먼촌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 나에게 조부님의 산소 비문을 써 달라는 청을 해왔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란 말을 누구한테서 듣고 부탁한다 했다. 글 쓰는 사람이긴 해도 그런 글을 써본 적 없다고 사양했지만, 같은 시조를 모시고 있고, 집안 내력도 모르지 않을 터에 자기 이야기를 들으면 쓸 수 있을 것이라며 강권했다.

  살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아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상을 높이 기리는 일을 해놓고 싶다 했다. 장손은 아니지만, 남은 자손 중에서는 가장 맏이로서 자신이 꼭 해야 할 일 같다고 했다. 내년 윤년을 맞아 비를 세우고 싶다 했다. 권에 못 이겨 써 보겠다 했더니 족보를 들고 찾아왔다.

  어느 날 풍수를 좀 아는 분과 할아버지 산소에 함께 갔었는데, 묫자리가 어떠냐 물으니 한참을 둘러보고는 ‘이 자리 때문에 지금 당신이 있게 된 것 같소.’라고 하더라 했다. 태어나기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이리 음덕을 내리시다니……. 겨를만 나면 할아버지 묘소를 찾아 제수를 차리고 지성을 다해 참배를 드리며 가꾸어 왔다고 했다.

  가난하여 학교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구두닦이며 얼음과자 행상 등으로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어찌어찌하여 기계를 수리하는 기술을 배워 섬유공장의 기사로 들어가 직기 수리 일을 하다가, 직기 몇 대를 구하여 손수 공장을 차렸다고 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수출 길도 열면서 수십 년을 원만하게 경영해 왔다고 한다. 지금은 아들들에게 일을 맡기고 있다면서, 이 모든 것이 조상님의 음덕蔭德인 것 같다 했다. 모든 일에 정성을 다 바쳐온 그 삶의 이력이 바로 물려받은 음덕인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초상 행렬에 만장 오백여 장, 말 오십여 필이 뒤따르고, 할아버지를 흠모하는 후학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는 모두 할아버지가 인품이 높고 후덕하셨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했다. 좀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많은 이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았기 때문에 전해질 수 있는 일화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할아버지의 생애에 대해 기록으로 전해진 게 있느냐 하니 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다며 족보의 한 구절을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구한말 왕실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 역임 사실과 함께 ‘일찍부터 어질고 너그러운 도량과 재능을 지니고, 천성이 온후하여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있어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라는 인품에 관한 짤막한 기록이었다. 소상한 기록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이 소략한 기록이나마 그대로 비문에 반영하기로 했다.

  내가 쓴 비문 안을 메일로 몇 번 주고받기도 하고, 또 몇 번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안을 다듬어 나갔다. 조상의 음덕을 입어 후손들이 잘 살아가는 모습도 담고 싶었다. 금석문이라는 건 한 번 새겨 놓으면 영원히 남는 건데, 집안에 두루 보여 누구에게도 걸리는 곳이 없도록 하라 했다.

  드디어 비를 세우는 날이 왔다. 윤년 윤달 어느 봄날이었다. 내가 집안사람들과 더불어 비를 세우는 산소에 도착했을 때 비는 이미 서 있었다. 그분이 몇 사람과 아침 일찍 먼저 와서 석물 업자가 가져온 비석을 맞이하여 산신제를 먼저 올리고 중장비를 동원하여 비를 세웠다고 한다. 각자刻字하면서 씌운 보호막을 벗겨내는 중이었다.

글자 보호를 위해 단단하게 붙어있는 보호막을 힘들여 벗겨내자 비문이 드러났다. 돌아가신 지 백여 년 만에 모시는 비석이다. 묘주를 새긴 전면에 이어 세 면에 걸쳐 묘주의 시조, 파조며 윗대 조상을 밝히고 가문을 빛나게 한 업적이며 인품, 그 음덕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후손의 모습과 그 덕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는 취지로 끝을 맺었다.

  흰 천을 씌우고 할아버님의 숭모비를 제막하겠다며, 여러 곳에서 달려온 후손들과 함께 줄을 당겨 막을 벗기자 비가 다시 드러났다. 아들딸 손주들이 박수를 모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모두 이 할아버지의 은덕이며, 더욱 성실하게 살아 그 덕을 더욱 빛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하는 말로 제막의 뜻을 기렸다. 감회가 다시 깊어지는 듯 비를 쓰다듬으며 비문을 읽어나갔다.

  열심히 사는 것이 할아버님의 덕을 기리는 길이라 여기며 살아오다 보니 이제야 묘의墓儀를 갖추게 되었음을 널리 헤아려 주십사 하는 축문을 낭독하고 헌작하는 것으로 석물을 갖추는 제의를 올렸다. 도포와 유건을 갖춘 복식으로 제를 올리는 그분의 모습은 정중하고도 엄숙했다. 산소를 다시 둘러보니 그동안 끊임없이 다듬고 가꾸어온 정성이 역력히 보였다.

  이 정성이 어찌 조상만을 숭배하는 마음일까. 이런 정성이 가업과 가문을 잘 다스려 오게 한 것 같았다. 그 마음이 자신을 성실하게 하고 후세를 성실하게 하는 지표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묘의를 갖추어 갈 때, 새잎이 나기 시작한 묘 주위의 나무는 연록을 더해 가고, 흰 구름이 유유히 떠가는 푸른 하늘에서는 맑은 햇살이 축복처럼 내리고 있었다.

  “이 모두 이 선생 덕분일세!”

  “모두가 할아버지의 정성이지요. 더 좋은 일 많으셔야지요.”

   나도 무슨 뜻 있는 일을 이루어낸 듯한 뿌듯함이 없지 않았지만, 그분의 지극 정성이 조상을 빛나게 하고, 자신의 삶을 기름지게 한 것 같았다.

  듬직한 용두를 이고 덩실하게 서 있는 비석이며 묘소를 한 바퀴 돌아 모두 가볍고도 진중한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202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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