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이청산 2023. 3. 26. 14:21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삼월, 마침내 봄이 온다. 냉기 가득한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해 나온 것 같다. 아직 완전히 통과한 것은 아니다.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달려가면 따스한 햇살이며 맑고 푸른 하늘이 나타날 것이다.

  그 터널의 출구를 제일 먼저 틔운 것은 상사화 잎 움이다. 찬 바람 불고 눈발도 날려 아직도 겨울이 제 품새을 지키려 간힘을 쓰고 있는 어느 날 그 냉기를 뚫고 꽁꽁 움츠리고 있던 알뿌리에서 움을 밀어냈다. 저 움이 자라 치렁한 잎을 피워내다가 여름 들머리에서 잎을 다 거두고 꽃대를 밀어 올릴 것이다.

  봄 하늘을 가장 먼저 연 사람은 마을 농군 정태 씨다. 올해부터 벼농사를 거두고 사과 농사를 지어볼 참이라며 굴착기를 동원하여 너른 논들을 파기 시작했다. 서너 자 깊이로 골을 파서 파이프를 깔고 다시 묻었다. 사과는 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배수로를 미리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논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논들이 비로소 부스스 겨울잠을 털어내는 듯했다.

  얼고 메마른 강둑 길섶 흙이 조금씩 누글누글해지는가 싶더니 마른 풀 사이로 파란빛이 돌기 시작했다. 오밀조밀 손톱보다 작은 이파리들이 솟아났다. 꽃은 더 있어야 피울 별꽃이다. 머잖아 별 모양의 조그맣고 하얀 꽃들을 피워낼 것이다.

  강물도 얼음을 다 녹여내고 맑은 낯빛을 드러내며 건너 강둑에 늘어선 벚나무 그림자를 가지런히 담아냈다. 나무에도 무언가가 꼬물거리고 있는 것 같다. 이제 한 달 후쯤이면 저 물은 아리따운 꽃 그림자를 줄 세우면서 꽃단장을 하게 될 것이다.

  산을 오른다. 올봄 첫 노란 양지꽃 한 송이가 앙증스럽게 피었다. 크기는 아기 손톱만 해도 낼 빛깔은 다 낸다. 어제만 해도 한두 송이 보일까 말까 하던 생강나무꽃이며 올괴불나무꽃이 군데군데 보인다. 저들은 이웃 큰 나누의 잎들이 푸르러 그늘이 우거지기 전에 저들의 꽃을 피워 내려 서둘러 꽃피울 날을 잡은 것 같다.

  엊그제 망울을 돋우어내던 진달래는 드디어 진홍빛 꽃을 터뜨렸다. 아직은 한두 송이뿐이지만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모든 망울에 꽃이 다 터질 것 같다. 누가 먼저 피우나를 다투기라도 하는 걸까, 진달래 옆에 선 생강나무는 다른 곳보다 더 큰 꽃송이를 달았다.

  다시 아침이다. 트랙터가 힘차게 갈고 있는 들판 두렁길을 걷는다. 곧 꽃을 피워낼 냉이며 꽃마리, 고들빼기, 방가지똥, 뽀리뱅이, 씀바귀 근생엽들이 마치 제 세상을 만난 것 마냥 여기저기서 뾰족이 얼굴을 내민다. 흙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봉글봉글 솟아오르고 있다.

  골짜기 길로 든다. 건너편 산자락에 엊그제 안 보이던 매실 꽃이 활짝 피었다. 저리 소리소문없이 느닷없이 피면 보는 사람은 어찌 감당하란 말인가. 이쪽 언덕배기에도 모두 꽃으로 필 근생엽들이 한창 손길을 벌려 가고 있다.

  이 언덕에는 보랏빛 현호색꽃이 많이 피는 곳인데, 그건 아직 철 이른 건가. 그러면 그렇지, 자세히 보니 둥글 길쭉한 잎들이 가는 잎자루 끝에 조그만 손을 내밀고 있다. 저 잎이 조금 더 벌 때면 수줍게 고개 숙인 꽃이 피어날 것이다.

  삼월은 어지러우리만치 현란하다. 강둑이며 들판이며 산이며, 언제 어디를 보든 같은 모습이 아니다. 돋아나는 풀의 수효도 다를 뿐 아니라 빛깔도 모양도 어제의 그것이 아니다. 꽃은 또 어떠한가. 붉고 노랗고 흰 꽃 빛이 날마다 그 명도와 채도를 달리고 하고 있다.

  삼월엔 어디 무엇을 봐도 날이면 날마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없다. 인디언들도 삼월의 이런 모습을 알아채고 그리한 걸까. 늘 자연 속을 사는 인디언들은 달력을 만들 때 그들이 늘 대하는 풍경이며, 그 풍경에서 느껴지는 마음을 따라 그달 그달의 이름을 붙였는데, 아라파호 족은 삼월을 두고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이라 했다고 한다.

  정녕 삼월은 한결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달인 것 같다. 무엇이 달라져도 시마다 날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 달라지는 모습이며 빛깔이 퇴화하고 퇴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습은 점점 자라 커지고 있고, 빛깔은 날로 짙어 우아해지고 있다.

  그래서 삼월은 생명의 계절, 생동의 계절이라 하는가.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삼월에 삶의 의욕을 얻고 그 의욕 따라 힘줄을 세우는가. 어느 시인은 봄 들판을 두고 ‘출렁이는 생명의 출항’(신달자, 「봄의 금기 사항」)이라고도 하지 않았는가.

  삼월을 두고 ‘한결같은 것이 없다.’라는 것은 무상 변전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나날이 나아가고 짙어지고 세어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삼월은 약동한다는 말이다.

  삼월이다. 모든 것이 나아가고 짙어지고 세어지는 삼월이다. 이 삼월에 나는 무엇으로 나아가고 어떻게 짙어지고 얼마만큼 세어질 수 있을까.

  이 삼월의 노을은 또 어떻게 아름다울까. ♣(202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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