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세월의 얼굴

이청산 2023. 4. 10. 15:39

세월의 얼굴

 

한 달여 만에 이 선생을 다시 만났다. 전에 만났을 때부터 느껴져 온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다시 만나 한번 풀어보자 했다. 이 선생도 나도 반갑게 달려와서 만났다. 술잔을 부딪치고 기울이며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주로 ‘세월’이었다.

  전번에는 다섯이서 만났다. 어느 날 문득 이 선생의 전화가 왔다. 웬일이야! 서로 놀랐다. 이십여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보고 싶다 했다. 모두 어떻게 변했는지도 궁금하다 했다. 그래, 만나자, 만나 보자.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도 한번 들어보자 했다.

  사십 년이 다 되어간다. 그때 우리는 모두 한 직장에서 생활하는 젊은 직장인들이었다. 할 일에 쫓겨 힘들었지만, 퇴근길에 이따금 삼삼오오 모여 잔을 함께 기울이면서 업무의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면서 서로 주고받는 정을 나누어 갔다. 

몇 해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근무지를 바꾸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헤어져도 마음은 나누고 살자며 일곱이서 모임을 만들었다. 이름을 ‘화연회(花緣會)’라 했다. 직장 이름의 첫머리 글자를 따서 ‘화(花)’를 넣었지만, 이름처럼 꽃같이 아름다운 인연으로 살자 했다. 근무지는 달리했지만, 철 따라 그 철의 꽃이 필 무렵이면 만나 지난날을 돌이키며 추억에 젖기도 하고, 바뀐 직장 사정들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만나면 늘 지난날의 직장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고, 정도 그랬다.

  그 세월 다시 몇 년이 흐르는 사이에 근무지가 계속 바뀌어져 갔고, 직장이며 가정을 사는 일도 환경도 지난날 같지 않게 되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임을 한두 번 빼먹게 되다가 마침내는 적조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세월 탓일지언정,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그렇게 못 만난 지도 어느덧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버렸다. 삼사십의 중년들이었던 사람들이 이제 칠팔십의 노년들이 된 것이다. 흘러간 세월이 끔찍했다.

  가끔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 살아 있기나 할까, 하는 생각으로만 지내던 어느 날 불현듯 이 선생의 전화가 온 것이다. 모임의 총무를 하던 사람이다. 연배는 좀 낮지만 일에 재바르고 아래위를 잘 알기도 했던 그였다. 몇 년 전에 정년퇴직하여 고적히 지내다 보니 지난 시절이 돌아보면서 그 시절의 사람들이 그립더라 했다. 그 젊은 이 선생도 퇴직했구나! 모두 한번 만나보자 했다. 옛날 전화번호만 남아 있지만, 어찌해서라도 수소문해 보겠다 했다.

  이 선생과 통화한 두어 주일 후, 만났다. 일곱 중에 다섯이 모였다. 두 사람은 끝내 연락이 안 되더라 했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참 반갑습니다. 그동안 그래, 어떻게 지내왔습니까? 그야말로 모두 무량한 감개에 젖었다. 퇴직한 지 십 년이 되어가거나 십수 년이 지난 사람도 있었다. 세월은 저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고이 두지 않더라며 허탈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는 못 보던 얼굴 주름 물론이지만, 한두 가지 병들은 다 지니고 있다 했다.

  김 선생은 무릎이 아파 제대로 걸을 수 없어 출입도 거의 하지 않는다며 세상일에 별 신경 안 쓰고 산다 했다. 카톡방이라도 만들어 소식은 나누고 살자 하니 그런 것도 할 줄 모른다며 구식 전화기를 보였다. 연배가 가장 높은 이 선생은 한창 시절 술도 잘 먹고 놀기도 잘했는데, 술 끊은 지가 십여 년은 되었다 했다. 몸에 가려움증이 생겨 술만 먹으면 더 심해져 먹을 수 없단다. 술 안 먹으니 사람 만날 일도 줄어들어 집에만 박혀 있는 날이 많아, 아들딸 손자들이며 지인들과 SNS 소통이나 하며 지낸다 했다. 남 선생은 잠잠히 미소만 지을 뿐, 별말이 없다. 한창때도 말수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말이 더욱 적어진 것 같다. 수년 전 사고를 당하여 머리 부분에 충격을 받은 후로는 말도 생각도 잘할 수 없노라 했다.

  술잔을 들 수 있는 사람은 총무 이 선생과 나뿐, 다른 이들은 사이다 한 모금씩으로 입을 축였다. 이 선생이 그중 제일 젊고 활발한 편이다. 퇴직 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조그만 밭을 가꾸면서, 어느 대학 학점 은행에 등록하여 불교 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했다. 나는 어느 한촌 궁벽한 산중 마을에서 책이나 읽고 간혹 글도 쓰며 살고 있노라 했다. 술에 취해 가는 사람은 이 선생과 나뿐이었다.

  지난날 직장살이 때의 이러저러한 기억들이며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들을 한참 나누다가 ‘그래, 나중에 또 봅시다.’ 하며, 언제일지도 모르는 ‘나중’을 기약하고 일어섰다. 젊은 이 선생이 잘 걷지도 못하는 김 선생을 부축하여 택시에 태워 보내고 네 사람은 지하철로 내려가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며칠 뒤 이 선생의 전화가 왔다. “그때 우리 만남이 어땠습니까?” “반가웠지, 그런데 뭔가 좀 서글펐다 할까…….” “그렇지요? 저도 반가우면서도 좀 우울했습니다. 세월 끝에는 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건지……. 형님하고 둘이 한번 만나 다시 한번 회포를 풉시다.” “그러세~!”

  둘이 만났다. “그래도 형님과 만나니 마음이 좀 편합니다. 다른 형님들은 만나자는 게 오히려 불편을 끼치는 일 같데요.” “그게 ‘세월의 얼굴’ 아니겠나.” “세월의 얼굴~!” “우리 얼굴도 가꾸기에 달렸듯이 세월의 얼굴도 가꾸기 나름이겠지.” “건강해야겠네요. 몸도 마음도~!” “그래, 우리 몸도 마음도 건강하기 애쓰며 사는 데까지 살아보자.” 호기롭게 잔을 부딪치다가 또 연락하자며 지하철로 내려가 손을 흔들었다.

  85세까지도 열심히 노래하던 가수 현미 씨가 KTX를 타고 대구 가서 공연하고 온 이튿날 아침에 쓰러져 편안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세상은 그를 두고 ‘영원한 디바’라 했다. 그 세월의 얼굴은 참 아름다울 것 같다.♣(20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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