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기다림에 대하며(5)

이청산 2023. 2. 26. 12:05

기다림에 대하며(5)

 

  작은 기다림만 있으면 된다. 창창한 포부며, 우렁찬 이상이며, 풋풋한 희망이며, 달금한 꿈 들은 없어도 된다. 그런 것들이 새삼스레 찾아와 주지도 않겠지만, 찾아와 준대도 가볍잖은 짐이 될 것 같다.

  해넘이 저녁 빛이 곱다. 저 해 저리 고운 빛을 뿌리기까지는 붉고도 푸른 꿈을 안고 지상으로 솟아올라 세상을 서서히 비추어 나가다가, 드디어 하늘 한가운데 이르러 모든 세상을 다 안아 보기도 하며 환호를 터뜨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 환희에 작약하고 있으려고만 하지 않았다. 넘어갈 줄도 알고, 질 줄도 아는 품새가 저 고운 빛을 그려 냈을지도 모른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저 해는 제가 만든 고운 빛 속으로 자태 곱게 들것이다.

  홀가분해서 좋다. 한창때는 무거운 짐도 무거운 줄 모르고 지면서 때로는 방장한 혈기로, 때로는 종작없이 덤벙이며 살아오기도 했다. 돌아보면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런 날이 있었기에 오늘도 있지 않을까 싶어 소곳한 위안을 가져 보기도 한다.

  다 벗어버리고 나니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도 가뿐하지만, 무언가 조금은 허전한 듯한 상념이 살며시 고개를 들기도 한다. 아니다. 허전할 게 없다. 그 비어 있는 듯한 자리를 고즈넉이 채워 줄 게 없지 않기 때문이다. 기다림이다.

  나는 오늘도 간절히 기다린다.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고, 보고 싶은 것을 기다린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라고 한 살렘 왕의 말(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이 아니라도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반드시 온다. 올 수 없는 걸 기다리는 일은 이미 내 의식의 구성 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기다림은 내게 무엇인가.

  기다림은 미소다. 활짝 벌려 웃는 대소도 아니고, 떠들썩하게 웃는 홍소도 아니고, 웃음 같잖은 냉소나 비소일 리는 더더욱 없다.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가는 작은 웃음일 뿐이다. 기다리고 있는 순간은 언제나 미소가 지어진다. 까닭이 없다. 그냥 지어지는 미소다.

  기다림은 기쁨이다. 기다림의 미소는 늘 기쁨을 손잡고 온다. 미소가 그런 것처럼 넘치는 환희로 펄펄 뛸 기쁨도 아니다. 흠뻑 축배라도 들고 싶은 기쁨도 아니고, 손뼉이라도 치지 않으면 못 배길 기쁨도 아니다. 그냥 가슴이 아침 빛같이 밝아지는 기쁨이다.

  기다림은 온기다. 펄펄 끓는 가마솥 온기도 아니고, 증기가 술술 오르는 열탕의 온기도 아니고, 군불 넉넉히 지핀 시골집 방 아랫목 같은 뜨끈한 온기도 아니다. 입에 머금어 음미하기 좋은 찻물 같은 온기다. 그냥 마음을 아늑하게 해주는 기운이다.

  기다림은 사랑이다. 그런 미소며 기쁨이며 온기라면 사랑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때를 불같이 태우는 젊은 연인들의 사랑도 아니고, 붙이 생각에 늘 목메는 어미의 애절한 사랑과도 다르다. 생각만으로도 심박수에 운율과 리듬을 주는 삽상한 사랑이다.

  그런 기다림으로 또 하루해가 가고 달이 가고, 생애가 고운 노을빛을 향해 사붓사붓 자박자박 걸어간다. 

주일이 바뀌면 매주 한 번씩 만나는 수필 가족들이 기다려진다. 모여서 울고 웃으며 사랑과 미움도, 즐거움과 괴로움도, 자랑과 부끄럼도 스스럼없이 나누는 가족들, 그게 수필이 아니냐 했다. 그 고백을 빼면 수필에 뭐가 남는가. 그러니 어찌 정이 들지 않을 수 있느냐 했다.

  달이 바뀌면 달거리로 만나는 친구들과 나누는 술잔이 눈에 어린다. 그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목숨 걸고(?) 치열한 만남을 이어갔던 역전의 용사들, 그 짙은 술잔 속에 어떤 담론을 담아도 정 아닌 게 없는 친구들, 이런 친구들이 있다는 건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철이 바뀌면 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이 기다려진다. 추위 채 가시지 않는 겨울 끝에 내민 촉으로 잎을 피우다가 여름 들면서 속절없이 져간 저의 자리에 애틋한 꽃을 피워내는 상사화, 봄 익은 마을 강둑에 흐드러지는 벚꽃, 개망초 하얀 여름을 지나 가을을 아리따이 수놓는 쑥부쟁이며 둥근잎유홍초는 어떤가. 어찌 기다리지 않을 수 있는가.

  명절이며 무슨 새길 날이면 한촌 늙은 아비 어미를 찾아 달려올 아이들이 기다려진다. 그저 잘 살기만을 바라는 아이들이 의젓하고 정겨운 모습을 하고 안겨 오면 어찌 살갑지 않으랴. 무슨 정성을 들고 올까. 저들의 환한 얼굴이 으뜸 치성이 아니던가.

  그러구러 날이 가고 달이 가다 보면 나를 싸안을 고운 노을빛이 기다려진다. 그 빛 속으로 모든 걸 내려놓은 편안한 얼굴빛으로 곱게 들 내 모습을 그려본다. 그늘 없는 빛으로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 기다림들이야말로 언제나 함께하고 싶은 내 생애의 기쁨이요, 사랑이다. 무슨 포부며 희망이 더 필요하랴. 그런 것이 없이도 너끈히 살 수 있는 날을 위하여, 이 기다림만으로도 살 수 있는 생애를 위하여 내 여태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무슨 기다림이 더 소용 있을까. 작지만 소담스러운 그 기다림으로 또 하루에게 은근한 손을 흔든다. 오늘도 중천을 내리는 해가 고운 노을빛을 뿌리고 있다.♣(202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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