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무의 숙명

이청산 2022. 10. 9. 14:45

나무의 숙명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오르며 묻는다. 나는 왜 지금 이 산을 오르고 있는가.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떠한 길을 걸어 이 산에 이르렀는가. 그 ‘어디’는 어떻게 얻은 것이고, 그 ‘길’은 또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 얼마나 많은 세월의 테를 감으며 여기까지 왔는가.

나는 지금 나무를 보러 오르고 있다. 나무는 나의 거울이다. 나는 태어난 곳에서부터 왔다. 태어나보니 태어난 곳이었다. 아득한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순로가 손잡아 끌기도 했지만, 험로가 밀쳐내기도 하는 길을 힘겹게 걷기도 했다.

  나무를 본다. 저도 이곳을 가려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람에 불리다가, 혹은 어느 새의 부리를 타고, 또는 뉘 몸에 의지해서 땅에 떨어지고, 그 자리가 제자리 되어 싹이 트고 자랐을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평생의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나무는 태어난 자리가 클 자리고, 살 자리고, 죽을 자리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나무의 숙명이다. 나는 태어난 자리나 클 자리는 가릴 수 없었지만, 살 자리는 가리기를 거듭해 왔고, 지금도 가려서 가고 있다. 죽을 자리도 가려서 가지게 될 것이다.

  태어나 자라고 살아오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건 모두가 ‘선택’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선택할까 하는 것은 내 능력과 의지에 달린 일일 뿐이었다. 누가 나에게 조언을 해줄 수는 있을지언정 결정해줄 수는 없었다. 그 고독한 결정 속을 고단하게 살아야 했다.

나무는 평생을 두고 전혀 가릴 수 없는 저의 자리를 한탄하고 원망할까. 그렇게 몸부림치다가 말라 들기도 하고, 그 속을 못 이기어 자진이라도 할까. 그런 나무가 있다는 말은 들은 일이 없다. 나무는 오직 저의 자리에서 주어진 삶을 가꾸어 나갈 뿐이다.

사람은 자리를 가릴 수 있어 자유롭고 행복한가. 그런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많은 사람은 그 ‘가림’으로부터 쟁투를 시작해야 한다. 더 편한 자리, 호화로운 자리,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할 일에 매몰하며 때로는 남을 매몰차게 짓이겨야 한다.

  나무는 한살이가 힘은 들지언정 저의 자리가 있어 행복하다. 평지면, 비탈이면, 바위틈이면 어떤가. 나면서부터 얻은 제자리가 아닌가. 하늘, 땅, 바람으로부터 부여받은 제 터전이 아닌가. 누가 뺏을 수도 없는 저의 영토가 아니던가.

  나무는 그 영토에서 묵묵히 살아간다. 볕살이 내리면 볕살을 받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안으면서, 좀 힘들면 힘든 대로 상처가 지면 지는 대로, 흐르는 세월을 안으로 감으면서 모든 것이 저를 태어나게 한 하늘의 일이라 여기며 그저 살아간다. 

사람이 지고 나는 숙명은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지만, 나무의 숙명은 행복하다. 사람은 제 숙명에 따라 잘 살 수도 있고, 힘들게 살 수도 있고, 못 살 수도 있지만, 나무는 제 자리가 행복이다. 저 푸른 잎들을 보고, 저 빛깔 고운 꽃들을 보라. 행복하지 않은가.

  같은 나무라 해서 모두 같은 성질과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제 사는 자리에 따라 어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지 않다. 물이 푼푼치 않은 땅이면 뿌리의 길이를 달리해야 하고, 볕살이 너그럽지 않은 곳이면 가지의 방향과 잎의 크기를 바꾸어야 한다.

  뿌리는 물이 있는 곳을 찾아 뻗어 내려가야 하고, 잎과 가지는 햇살이 좋은 곳을 따라 펼치고 뻗어가야 한다. 다른 것들보다 더 길고 많은 뿌리가 자라게 해야 하고. 더 넓은 잎이며 더 많은 잔가지를 달아야 한다. 숙명을 넘어서는 운명이라 해야 할까.

  숙명은 타고난 것이라 바꿀 수가 없지만, 운명은 ‘명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던가. 숙명을 덧채우기 위해 운명을 부릴 수도 있다. 그것은 제 일일 뿐이다. 남의 것을 앗아 제 명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저를 위해 쓰는 애로 제 운명을 늘려나갈 뿐이다.

칡넝쿨처럼 고약하게 남의 몸을 감아 올라 제살이를 지키려는 것도 있지만, 그런 걸 만나면 그 잎보다 제 잎을 더 높이 세우려 할 뿐이다. 그것도 제 숙명이라 여기는 까닭일까. 그런 모습들을 보고 나무를 견인주의자라 했던가.

  사람은 숙명보다는 운명을 부려 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운명은 공들여 개척해 나갈 만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다른 이와 다투기 마련이다. 다투면 이겨야 하고, 지면 품격을 말살당하든지 아니면 죽기까지 해야 한다. 치열한 다툼일수록 더욱 그렇다.

  저 어디 정치판을 보라. 다른 무리를 향해서든, 저들끼리든 서로 물고 뜯기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그 판은 싸움 그칠 날이 없다. 그 판만이랴. 남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아도 물리치고 탓하는 일은 어렵지 않고, 참기는 어려워도 화를 돋우기는 쉽다.

  나무는 설령 숙명을 이기고 싶다 할지라도 남과 싸울 일은 없다. 저들 사이에도 경쟁이란 왜 없을까. 옆에 큰 키가 있으면 더 크려 하고, 다른 것보다 먼저 햇빛을 차지하고 싶은 생리야 왜 모를까. 그래도 그러기 위해 남을 짓밟으려 하는 나무는 없다.

  나무는 다른 것과 다툴지라도 그저 저의 일로 할 뿐이다. 이를테면 선의의 경쟁이다. 사람도 왕왕 그런 경쟁을 말하지만, 정녕 선의로써 경쟁하며 사는 이는 누구인가. 그 거룩한 현자는 어디에 있는가. 나무는 제 숙명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현자요, 인자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다소곳한 숙명을 만나러 오른다. 그 거울을 보러 오른다.

  사람아, 지고 있는 숙명에 겨울 때는 산으로 가자. 나무를 만나러 가자. ♣(202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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