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무의 무소유

이청산 2022. 9. 24. 15:36

나무의 무소유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를 보러 오른다. 나무는 내가 보려 하는 그 자리에 언제나 서 있어 아늑하게 한다. 늘 생기로운 모습으로 서 있어 더욱 아늑함을 준다. 막 잎이 날 때든 한껏 푸르러질 때든, 심지어 잎 다 지우고 맨몸으로 서 있을 때조차도 고즈넉한 생기가 전류처럼 느껴져 온다. 

  나무는 눈을 틔워 잎을 피워내던 시절을 거치면 푸름의 철을 맞이하게 된다. 잎이 자랄 대로 자라 푸를 대로 푸르러진다. 그즈음에 이르기까지 딴은 몹시 분주했을 것이다. 물을 빨아올리고, 햇볕을 조아려 받아 생체 조직을 작동시켜 엽록소의 빛깔로 드러내기까지 얼마나 분망했을까.

  나무에게 욕망의 철이 있다면 바로 이 시절이 아닐까. 푸름에 대한 욕심, 생장에 대한 푸른 욕심이다. 나무의 그 욕심은 여기까지다. 누구의 무엇도 탐내지 않고 스스로 한껏 푸르러질 수 있는 데까지다. 제살이 한철의 절정을 구가할 수 있는 이 모습까지다. 나무는 제철을 넘어서는 욕심을 모른다.

  다음 철에 이른다 싶으면 그 풋풋했던 푸름의 빛깔을 미련 없이 벗는다. 그 빛깔을 벗고 나면 지닌 품성을 따라 노란빛, 붉은빛, 갈색빛 들을 띠게도 되지만, 어쩌면 그런 빛들이 타고난 제빛인지도 모른다. 제빛을 찾아 푸름의 싱그러운 여행을 했던지도 모른다. 그 여행길의 끝에서 제빛과 만나는 것이다. 

  이 빛깔들에도 마냥 머물지는 않는다. 갈 것은 가야 올 것이 온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바람의 철도 바뀌어 부는 품새가 산산해진다 싶으면 제 태어났던 자리로 내려앉는다. 익숙한 몸짓으로 기꺼이 내린다. 가지도 이미 떨켜로 잎과의 작별을 예고한 터였다. 보내는 것이 곧 돌아오게 하는 것임을 또한 모르지 않는다.

  어떤 나무들, 이를테면 감태나무며 떡갈나무 중의 어떤 것은 끝끝내 마른 잎을 붙들고 있기도 한다. 가기 싫고 보내고 싶지 않은 속된 욕망 때문일까. 아니다. 다음에 날 것의 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고한의 계절을 인내로 견뎌내는 것이다. 눈물겨운 모성의 자력이라 할까.

  이제 나무는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벗어버렸다. 그 왕성했던 갈맷빛 청춘도, 농익은 장년의 빛깔들도 모두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갖지 않았던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 많은 것’이란 소유욕이 아니라 세상을 맑히기 위한 무소유의 다른 마음일 뿐이다. 

  나무의 허심은 잎을 떨어뜨리는 것에만 있지 않다. 가지도 떨어뜨린다. 나무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가지를 뻗어내지만, 그것들을 생애 끝까지 다 품지는 않는다. 나무는 떨어뜨릴 건 떨어뜨려야 새로운 것을 키워낼 수 있음을 알고 있음은 물론이다. 키 큰 나무들을 보라. 줄기에서 밑동에 이를수록 가지가 없거나 드물다. 성장해가면서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다 보면 마른 나뭇가지들이 떨어져 있거나 툭 하고 떨어지는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저들이 성장해 나가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소유에 욕심을 두지 않는 까닭이다. 그렇게 정리하지 않는다면, 그 많은 것을 품고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산을 걷는 이들은 산과 나무를 보면서 감명과 위안을 얻는 일 말고 또 하나 해야 할 일이 있다. 걷는 발 앞에 떨어져 있는 가지를 치워 길을 트는 일이다. 비바람이라도 심하게 치고 난 다음이라면 톱 하나쯤 들고 오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들어서 치울 수 없는 건 잘라서라도 치워야 하기 때문이다. 

  불평 삼을 일은 아니다. 나무의 삶과 그 속내를 안다면 불평할 거리가 아님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가지를 그리 버리지 않는다면 그 존재가 얼마나 힘들 것이며, 그로 인해 나무가 생기를 잃는다면 산을 올라 무엇에서 감동과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길을 막고 있는 마른 가지들은 편한 자리로 옮겨주면 된다. 함께 사는 일이 아닌가.

  나무가 내려놓는 것은 잎과 가지뿐만이 아니다. 마침내는 그 몸을 다 내려놓는다. 나무는 명이 다하면 선 자리에서 그대로 생애를 내려놓으면서 강대나무가 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살아있을 때도 그러했지만, 내려놓은 생애로는 뭇 짐승들이며 온갖 미물들의 더욱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어준다. 

  거센 바람 부는 어느 날 선 자리에서 쓰러지게 되어도 온갖 것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 비에 젖고 바람을 맞으며 시나브로 흙이 되어간다. 어느 세월에일지 한 줌 흙으로 돌아가 있다가 하늘이 주는 씨를 받아 다시 태어날 것이다. 다시 오랜 세월을 감으며 무소유의 생애를 또 시작할 것이다.

  나무의 무소유란 ‘지지불태知止不殆’에 대한 깨달음이요 그 실현이라 할까. 그 아리따운 꽃도 풋풋한 푸름도 세월을 이겨낸 붉고 노란 빛깔들도 내내 가져가려 하지 않는다. 놓을 때 놓을 줄 알고 질 때 질 줄을 안다. 그 마음 그 뜻이 산을 오르는 내 걸음을 이리 아늑하게 하고 있음을 나무가 내려놓은 가지를 옮기며 다시 돌아본다.

  그 나무를 보면서, 내려놓은 가지를 들어 옮기면서 나는 또 세사의 무엇을 욕심내고 있는가. 무엇에 마음을 졸여 심사를 어지럽히고 있는가.♣(202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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