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사람은 땅을 본받고

이청산 2021. 7. 12. 14:36

  동네 인심이 전 같지 않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말라가는 것 같다고 한다. 

내가 이 마을을 산 지도 십 년 세월이 넘어 흘렀다. 산전수전의 한 생애를 정리하고 이제는 산 치레 물 치레로 살리라 하고 산수 좋은 곳이라 찾아와 산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 세월 따라 흐르지 않고 달라지지 않은 게 무엇이 있으랴만, 동네도 많이 변했다. 사람도 흐르고 산천도 바뀌었다.
  모처럼 이 궁벽한 마을을 찾아와 살려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마을 사람은 두 팔 벌려 반기고 환영해 주었다. 사는 데에 어디 편치 못한 일이나 없는지 살펴주려고도 했다. 살면서 얼굴도 마음도 익어지니 처음 같지는 않았지만, 서로 노나 가지려는 인심은 쉬 달라지지 않았다. 집집이 돌아가며 마련하는 화기 그득한 자리로 정을 나누기도 했다. 늘 그렇게들 살아왔다고 했다. 참 살기 좋은 마을인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 정을 나누며 사는 사이에 윗마을 모과나무 집 할매, 옥천 할매 내외, 하내 할매, 김 씨 노인 내외도 저승으로 가고, 아랫마을 김 씨 노인 내외며 이 씨 부부도 세상을 떠났다. 드는 사람은 드물고, 집은 자꾸 비어가니 동네가 전보다 적막해지긴 했지만, 그거야 누가 막을 수 있는가. 세월이 흘러 세상을 달리해 가는 일이야 자연의 일이 아닌가.

어느 날 대형 삽차가 강둑에 나타나 둑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강둑에 우거져 있던 푸나무들을 짓이겨댔다. 사람들이 지나다니기에는 좀 불편해도 온갖 풀들이 돋아나고, 풀마다 가지각색의
꽃들을 피워내던 길이었다. 냉이, 산괴불주머니, 고들빼기, 씀바귀, 애기똥풀, 달맞이, 메꽃, 나팔꽃, 사광이아재비, 개망초, 원추리, 큰까치수염, 둥근잎유홍초. 달개비, 도깨비바늘……. 셀 수도 없는 수많은 꽃이 철 따라 갖가지 모양으로 빛깔로 피어났다. 꽃을 보며 걷는 길이 풀잎에 맺힌 이슬로 바짓가랑이를 다 적시게 해도 마음은 더없이 아늑하기만 했다. 이런 길이 있다는 것이 고맙고도 신기했다. 

나만의 물색 모르는 상념이었을까. 몇 마을 사람들이 요즈음 세상에 편히 걷지도 못하는 이런 길을 어찌 두고 볼 수 있느냐며, 매끈하게 다듬어 달라고 관서에 질기게 진정했다. 마침내 관서에서 삽차를 내보냈다. 파헤친 길 위에 거푸집을 치고 철근을 깔고 회반죽을 들이부었다. 길은 매끈해졌다. 이슬이 바짓가랑이를 적실 일도 없어졌다. 편하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차도 트랙터도 경운기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차가 자주 다니다 보니 강둑 길섶에 줄지어 선 벚나무 가지가 거치적거린다. 봄이면 온 강둑을 화사한 꽃 천지로 만드는 나무다. 중장비가 지나다니면서 늘어진 가지를 참혹하게 찍어 내리기도 했다. 

일 잘하고 수완 좋은 이가 이장이 되었다. 그는 지역 무슨 단체에 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관서에 교섭하여 마을 길을 다시 다듬게 했다. 길섶을 수놓고 있는 꽃이며 풀들을 다 걷어내고 포장하여 길을 넓혔다. 여름이 들 무렵이면 마을회관 앞길을 환히 밝히던 붉은 작약꽃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차들이 마음대로 교행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이장은 자기가 이룬 성과라며 자랑스러워했다. 모든 마을 길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말끔한(?) 길이 되었다. 

하천 정비 공사를 한다며 삽차들이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강바닥을 긁어내고 보(洑)도 더 깊이 팠다. 홍수가 나면 어찌 될지 몰라 제방을 더 높여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자면 제방 주변에 서 있는 나무들을 다 베거나 뽑아내야 한다고 했다. 나뭇값은 적절히 보상해 줄 거라 했다. 수십 년 묵은 은행나무며 느티나무, 회나무는 값도 적잖이 나갈 거라 했다. 동네 기금이 쌓인다며 좋아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었다. 이장은 그것도 자기의 공이라며 으쓱해 했다. 그런 나무가 있는 자리를 비켜서 공사를 하거나, 공사 후 다른 나무라도 심어야 할 거라는 목소리가 없지 않았지만, 그 소리는 보상비의 위력에 무참히 묻히고 말았다. 강둑은 보강되고 둑길은 잘 다듬어졌지만, 나무 한 그루 없는 메마른 땅이 되어야 했다. 

그런 일들이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이에 사람들의 삶도 달라져 갔다. 사람들이 서로 집집을 오가는 일이 서서히 잦아져 갔다. 정겹게 오라는 집도 드물어가고, 만만히 찾아갈 만한 집도 녹록지 않게 되었다. 어느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안다던 시절은 전설이 되어 갔다. 우리 집에서 빚은 맛난이라며, 우리 밭에서 난 푸성귀라며, 장에 간 김에 뭘 하나 더 사 왔다며 서로 주고받던 일도 가물거려 갔다. 무슨 연유일까.
  회반죽으로 휘덮은 강둑 길로 사람들이며 차들이 잘 다닐 수 있고, 마을 길이 넓어져 차들이 서로 잘 비킬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제방은 더 튼튼해지고 봇물은 넓고 깊어지지 않았는가. 이렇게 동네는 눈부셔지고 지내기에 편해졌는데, 푼푼했던 집집의 삶이며 그 삶으로 오가던 마음들은 어찌해 전 같지 않아진 걸까.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老子, 『道德經』)”고 하듯, 사람의 마음이 풀 한 포기 없는 길, 그 땅을 본받아 말라 가는 걸까. 아니면 도(道)가 제 길을 잃어 땅과 사람을 틀어지게 한 걸까.
  가끔씩은 어느 집에 모여 앉아 마을 돌아가는 이야기며 논밭 갈이 소식들로 남새 부침개에 술잔을 함께 가누던 시간들은 어디로 날아간 걸까. 그 술잔에 마음을 담그던 정들은 어디로 갔을까. 참혹하게 베어진 강둑 백 년 은행나무 혼령이 안고 간 걸까. 길섶에서 사라진 봄까치꽃이며 꽃다지, 제비꽃이 가져간 걸까.
  오늘도 매끈한 강둑 길에는 늘어진 벚나무 가지를 젖히며 차가 달리고 있다.♣(20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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