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모두 다 꽃이야

이청산 2021. 6. 9. 14:52

모두 다 꽃이야

 

이   일   배

 

  내가 보는 풀꽃마다 보내 달라고 했다. 아침마다 늘 풀꽃 길을 걷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길에서 만나는 꽃들을 날려 보냈다. ‘참 예뻐요!’, ‘너무 곱게 피었네요~!’와 같은 짧은 댓글을 보내올 뿐이지만, 그 어투에서는 꽃들을 진정으로 반기는 마음이 묻어났다. 내 산책길의 눈길은 그 마음을 좇아간다. 

  아침 산책길을 나선다. 두렁길도 걷고, 강둑길도 거닐고, 골짝 길도 간다. 어느 길에도 풀꽃이 없는 길은 없다. 두렁길에는 봄 내내 길을 꾸며 주던 봄까치꽃이며 꽃다지, 냉이꽃은 한철을 지나가고, 누운주름잎만이 가는 봄을 지키려 하고 있다. 그것들은 벌써 이 강산 봄소식이 되어 날아간 지 한참 되었다.

  오늘은 뭐 새로운 게 없을까, 어쩌면 오늘 내가 걷는 길은 어제 보지 못했던 걸 찾아가는 걸음인지도 모른다. 그 길에 새로 피어나는 모든 꽃은 내 사는 곳의 새 소식 되어 날아가곤 했다. 그는 늘 올해의 새로운 소식을 받는 셈이다. 이름을 물어온다. 아는 대로 혹은 알아내어 가르쳐 주면, 알면 보인다며 다시 감탄의 답글을 보내온다. 

  강둑에는 자세히 보면 다 다르지만, 얼핏 보면 어슷비슷한 노란 꽃들이 한창이다. 노랑선씀바귀, 씀바귀, 고들빼기 그리고 뽀리뱅이다. 꽃잎의 모양도 조금씩 다르지만, 꽃술의 빛깔도 같지 않다. 한가지로 보이지만 다 다른 거라고 말해주면, 또 한 번 감탄한다. 어찌 그리 잘 아느냐 묻는다. 나는 이들과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니냐고 은근히 젠체한다. 

  둑에 지천으로 피는 꽃이 애기똥풀과 개망초다. 봄이 다 갈 때까지도 둑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애기똥풀은 줄기를 자르면 아기 똥 같은 노란 즙이 나온다고 붙은 이름이란다. 꽃말도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다. 인제 내 차례라며 긴 줄기를 세워 노란 꽃술 하얀 개망초가 쏙쏙 피어나고 있다. 아무 데나 가리지 않고 잘 나는 바람에 농부들 애를 하도 먹여 ‘개같이 망할 풀’이라며 뽑아 던진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나. 그래도 꽃말은 ‘화해’다. 두 꽃을 접사로 담아 띄웠더니 너무 이쁘다며 감탄부를 몇 개나 찍어 보냈다. 

  풀숲 속에서 활짝 갠 얼굴을 내밀고 있는 메꽃은 아침 인사가 착실하다. 하늘하늘 미나리아재비도 인사에 빠지지 않는다. 그 인사 그대로 전해주었다. 좋은 날 보내라는 인사가 돌아온다. 가시 돋친 핏빛 엉겅퀴꽃 하나가 오뚝 섰다. 꽃을 보내며 시 한 구절 들려준다.

  “들꽃이거든 가시 돋친 엉겅퀴이리라 / 사랑이거든 가시 돋친 들꽃이리라 / 척박한 땅 깊이 뿌리 뻗으며 / 함부로 꺾으려 드는 손길에 / 선연한 핏멍울을 보여주리라 (복효근, 「엉겅퀴의 노래」)” 무섭고도 슬퍼 엉겅퀴 가시 같은 소름이 돋아 오른단다. 

  물가에 흐드러지게 핀 노란 갓꽃들 속에 노랑꽃창포가 담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냉담, 무관심’이란 꽃말 가운데서 ‘믿는 자의 행복’이 넓적한 잎을 치세우며 노란 손수건을 흔든다. 손을 마주 흔들어주고 골짝 길로 든다. 언덕배기에 회색이 다소곳하던 현호색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 많던 자주 제비꽃도 흰젖제비꽃도 서울제비꽃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그 꽃들이 귀여워 죽겠다던 그의 웃음소리만 메아리지게 한 채 가는 계절 속으로 흘러갔는가.

  보일 듯 말 듯 저 잔잔히 핀 꽃, 자세히 안 보면 지나칠 하얀 개미자리와 쇠별꽃이다. 잘 보이게 담아 보내며 ‘나는 당신의 것’, 그리고 ‘추억, 밀회’라는 꽃말도 함께 띄웠더니, 몸이 갑자기 오그라드는 것 같다며 웃었다. 아니, ㅎㅎ을 보내왔다. 그것도 무슨 꽃 모양 같다.

  어, 저 꽃은 무엇인가! 눈을 닦고 자세히 보니 쇠별꽃 조그만 꽃잎을 둘씩 짝지어 놓은 것 같다. ‘모야모’에 물었더니 ‘유럽점나도나물’이라는 생경한 이름과 ‘순진, 경청, 가련함’이라는 꽃말을 보내왔다. 순진하고도 앙증맞은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역시 꽃은 ‘자세히 보아야’ 예쁜 모양이다. 풀꽃을 좋아하는 이를 기쁘게 해주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세히 보는 길이 든 것도 같다. 

  꽃은 골짜기 도랑 건너 산비탈 나무에도 피었다. 손톱보다 작은 꽃을 보던 눈에 비친 큼지막이 하얀 꽃이 눈부시다. 고광나무에 핀 오백 원 동전보다 조금 더 큰 듯한 꽃이다. 빛깔도 생김새도 품새가 달라 보인다 했더니, 꽃말이 ‘기품, 품격’이란다. 꽃이란 작은 것은 작은 대로, 큰 것은 큰 대로 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꽃도 날려 보냈더니 나를 닮았다고 했다. 나를 닮은 게 어찌 이 꽃뿐이겠냐며 나도 ㅎㅎ을 보냈다.

  맞아요, 꽃 속에 사는 사람이 꽃이 아니면 무엇이겠어요? 꽃을 좋아하는 사람 또한 꽃이지요. 자세히 보면요, 세상에 꽃 아닌 게 없어요. 아직 피지 않았거나 피우지 못한 건 있을지라도 모두 꽃을 품고 있지요. 피면 다 꽃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노래를 흥얼거려 나간다.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류형선 사·곡, 「모두 다 꽃이야」)”

  고광나무 옆에서는 붉은 꽃자루 흰 꽃잎 병꽃나무 꽃이 노랫가락을 따라 무슨 악기라도 부는 듯 일렁이고 있었다.♣(202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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