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산, 몸을 찾아서

이청산 2021. 7. 24. 20:40

산, 몸을 찾아서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걷는다. 무성히 우거진 숲의 그늘이 몸을 아늑하게 한다. 불같이 쨍쨍거리던 햇살도 숲에 닿으면 양순한 그늘이 되고 만다. 산은 언제나 싱그럽다. 숲이 있기 때문이다. 산은 언제나 아늑하다. 숲의 그늘이 있기 때문이다.

  산에서는 흘리는 땀은 청량하다. 산의 땀은 몸을 새 깃처럼 가볍게 한다. 몸만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다. 몸 따라 마음도 가벼워진다. 가벼워지는 몸속으로 숲의 푸름이 스며든다. 푸름은 몸속으로 신선하게 가라앉는다.

  푸름이 침윤한 몸속에는 아무것도 들 수가 없다. 세상의 어떤 호사도, 이해도, 상념도, 이념도 감히 자리를 넘볼 수 없다. 속된 근심 걱정거리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하찮은 것들이 어찌 이 푸름의 성역으로 들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처음 산을 오른 것은 몸의 기운을 북돋우고 싶어서였다. 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몸의 힘살이며 내장의 기운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다. 그랬다. 그렇게 산을 두고 오르다 보니 그것들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심신이 가든해지는 것 같았다.

  더욱 좋은 것은 진실로 몸만을 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몸을 위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고, 필요로 삼고 싶지도 않았다. 호오며, 애증이며, 선악이며도 다 필요치 않았고, 이념이며 사상이며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일은 더욱 필요치 않았다. 

그런 것을 다 떨치고 오직 몸의 평안만을 위할 수 있는 게 산이라는 걸 왜 진작 몰랐을까. 그렇게 산을 알기 전에는 “성인은 배를 위하고, 눈을 위하지 않는다.(聖人爲腹不爲目, 『道德經』, 第12章)”는 노자의 말씀이 잘 새겨지지 않았다. 왜 성인은 배를 위하면서 눈은 위하지 않는다고 했을까. 노자의 말씀을 즐겨 들으면서도 말씀들은 나에게 늘 숙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노자는 이념이나 가치의 세례를 받기 이전의 상태를 배라고 표현하고, 그 세례를 받은 이후의 상태를 눈이라고 표현한 것(최진석, 『나 홀로 읽는 도덕경』)’이라는 어느 철학 교수의 말씀이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배와 눈을 말한 노자의 말씀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배’는 곧 몸이요, ‘눈’은 곧 이념을 뜻하는 것이라 했다.

  눈은 항상 밖을 향하면서 모든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 했다. 그렇구나. 눈이 곧 모든 것을 가르는구나. 좋고 나쁨도 가르고, 옳고 그름도 가르고, 내 편 네 편도 눈이 다 가르는구나. 그래서 사람에게 근심 걱정도 생기게 하고, 욕심과 질투도 솟게 하고, 술수와 투쟁도 부리게 하는구나. 노자는 일찍이 “마음은 비우고 배는 튼튼하게 하라(虛其心 實其腹, 上同 第3章)”고 하지 않았는가. 눈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마음을 믿지 말고, 모든 삿된 것이 아예 틈입할 수 없는 몸을 실하게 하라는 말씀임을 알 것 같다.

어디에 가면 그런 곳이 있을까. 눈이 아니라 몸으로 살 수 있는 곳, 눈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며 즐길 수 있는 곳이 어디 없을까. 말씀들을 아울러 뇌며 산을 오르다 보니, 산이 바로 거기였다. 산은 무슨 가치를 매기지 않아도, 이념의 푯대를 세우지 않아도 좋다. 마냥 걸으면 되고 그저 오르면 된다. 삽상한 바람에 젖으면 되고 명랑한 새소리 들으면 된다.

  노자는 산을 보면서 모든 말씀을 했던 것도 같다. 이를테면 “낳아주되 갖지 않고, 위해 주되 바라지 않고, 길러주되 간섭하지 않으니, 이를 일러 현묘한 덕이 한다.(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上同 第51章)”고 한 노자의 ‘현덕’란 곧 나무를 대하는 산의 마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듯 산을 보노라면 노자의 말씀이 모두 풀어지는 것 같다.

  산을 오르면서 산이 가진 마력에 잠기다 보니, ‘성인은 배를 위하고, 눈을 위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이 다시 새겨진다. ‘성인’은 자연이라 해도 좋다. 자연은 아무런 이념이나 가치 같은 걸 가지지 않고 그냥 그대로의 상태인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쟁쟁히 들려 온다.

그런 산을 오르는데 눈이 부채질해내는 무슨 사념 같은 게 왜 필요할까. 그냥 그대로의 몸으로 걷고 오르고 내리면 될 것이 아닌가. 사람 사는 일이 이와 다를까. 그냥 살면 되지 않는가. 산의 결처럼 살면 되지 않는가. 무슨 가치며 무슨 이념이란 걸 내세워 그것에 맞지 않으면 모두 적으로 돌려야 할 까닭이 있을까.

산은 그냥 몸으로 살라 한다. 몸을 위하여 살라 한다. 그 자연으로 살라 한다. 그렇게 사는 세상에는 오직 자연의 삶이 있을 뿐 이념이 부리는 술수며 쟁투란 있을 수 없다.

  이렇듯 배, 곧 몸을 중시하는 노자는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 귀하게 여긴다면 천하를 줄 수 있다.(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上同 第13章)”고 했다. 무엇을, 누구를 위하여 일한다는 사람보다는 자신 완성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세상을 더 잘 다스릴 수 있다는 말씀이라 했다.

  자기 몸을 위하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이루려 하는 사람일수록 산으로 갈 일이다. 산은 오직 몸을 위해 주기 때문이다. 아무런 이해타산도 없는 몸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세상은 경영 못 해도 몸은 위해 주고 싶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오직 몸을 위해 주는 산을 오른다. 몸을 찾아간다.♣(202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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