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해거름 산을 오른다. 산이 언제나 거기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산에 있기 때문이다. 늘 봐도 보고 싶은 나무다. 또 하나 큰 나무가 쓰러져 있다. 산에는 언제나 쓰러지지 않은 나무와 쓰러질 나무와 쓰러진 나무가 모두 하나가 되어 살고 있다.
걸음 앞에 가로 누워 있는 큰 둥치를 넘으려다 보니 두꺼운 껍질을 뚫고 숭숭 나있는 구멍들이 보인다. 무언가가 분주히 드나들었을 자리인 것 같다. 지금도 이 구멍 속에는 무슨 생명들이 거처를 마련하여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무도 죽는가. 나무도 죽는다. 죽지 않는 생명체가 어디 있는가. 그렇지만 나무는 삶과 죽음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살아서도 죽음과 함께 있고, 죽어서도 살아가다가 또 다른 삶이 되어 태어나는 것이 나무인 것 같다. 나뭇가지를 쳐다보라. 푸르고 싱싱한 잎을 단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잎도 없는 마른 가지도 함께 뻗어 있다. 물기 있는 것이라고 마른 것을 내치지도 않고, 마른 것이라고 쉽사리 제 자리를 버리지도 않는다. 한 나무에서 산 것 죽은 것이 함께 살고 있다.
커다란 나무일수록 거의 죽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세포의 수명이란 대개 두 달을 넘기기 힘들다고 한다. 그런 나무지만 누가, 무엇이 쓰러뜨리지 않는 한 수십, 수백 년을 거뜬히 살아간다. 삶과 죽음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인가. 
설령 나무가 죽는다 해도 그대로 내려앉지는 않는다. 선 자리에서 또 수많은 세월을 안아 간다. 그런 나무를 강대나무라고 한다. 그 나무를 두고 시인은 노래한다. “……나는 초혼처럼 강대나무를 소리 내어 떠올려 내 누추한 생활의 무릎으로 삼는 것이다./ 내가 나를 부르듯 저 깊은 산속 강대나무를 서럽게 불러 내 곁에 세워 두는 것이다.”(문태준, 「강대나무를 노래함」) 무릎으로 삼으며 내 곁에 세워 두는 나무라고 했다. 얼마나 편안해 보이면 무릎으로 삼고 싶은가. 얼마나 아늑해 보이기에 곁에 세워 두고 싶은가. 강대나무는 마냥 가만히 서있는 것은 아니다. 팡이실로부터 개미, 종벌레, 사슴벌레, 다람쥐, 오소리, 개구리, 뱀, 도마뱀, 멧돼지, 곰, 수많은 새 들이며 이끼, 들꽃, 작은 나무들에 이르는 무수한 동식물들의 쉼터,놀이터가 되고 생명의 집이 된다고 한다. 어느 산림학자는 이런 나무를‘약한 생물들을 구원하는 노아의 방주’라고 했다. 이 생명의 구세주를 두고 어찌 죽은 나무라 할 수 있는가. 죽어서도 많은 생명체들과 더불어 살고 있지 않은가. 십여 년 전 울릉도에 살 때, 한 섬사람으로부터 섬향나무로 만든 조그만 찻상 하나를 선물 받았다. 오늘도 그 찻상에 찻잔을 받쳐 놓고 차를 마신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무가 지닌 향이 여전히 은은하게 풍겨 나오고 있다. 차향이 한결 삽상하다. 이 나무를 또 어찌 죽은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죽어서도 향기를 내는 생명체가 또 어디 있는가. 인간세상의 의인 같은 풍취다. 이렇듯 모든 나무가 ‘살아있는’ 죽음을 맞는 것은 아니다. 이웃집 뒤꼍에 나이테가 백 줄쯤은 그어졌음직한 큰 살구나무가 있었다. 봄이면 연분홍 꽃 차림으로 마을을 화사하게 꾸며 그야말로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게 했다.그 나무가 어느 날 무참하게 베어지고 토막토막 잘려 가마솥 아궁이 속으로 던져졌다. 잎과 열매가 떨어져 밟히는 것이 성가셔서 땔감 삼았다 했다. 그게 베야 할 까닭이던가. 그 비정에 나무는 속절없이 죽어갔지만, 그 나무를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살아있을 것이다.인간이 아니면 나무가 그리 허망하게 죽을 일은 없다.
쓰러져 누운 나무를 보며 산을 오른다. 이제 이 나무는 어디로 가는 걸까. 쓰러진 나무가 흙이 되어 땅속으로 드는 데 150년 이상은 걸린다고 한다. 그 긴 세월을 하염없이 흘리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온갖 땅벌레며 뭇 짐승들의 거처요 안식처로 말 없는 세월을 다시 산다. 산은 이 나무로 하여 뭇 생명들의 부요한 터전이 된다. 그 유구한 세월과 더불어 흙에 누운 제 몸이 흙을 닮았다 싶으면 흙 속으로 든다. 그리고 봄을 기약한다. 싱싱한 푸름으로 하늘 향해 가지들을 쑥쑥 뻗고 있는 저 나무들은 어디서 난 것인가. 무엇으로 꽃과 열매를 맺고 마침내는 어디로 가는가.저 서있는 나무가 바로 이 누워있는 나무이고,이 누워있는 나무가 저 서있는 나무가 아니던가. 어느 것을 산 나무라 하고 어떤 것을 죽은 나무라 할까. 이들 나무에 어찌 삶과 죽음의 길이 다르다 할 수 있는가.
어쩌면 나무는 삶과 죽음을 초탈한 성자요, 생사를 하나로 섭렵한 현자요, 불사신이 있다면 바로 이 나무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 경건한 초월자의 모습 앞에 어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있는가. 오늘도 나는 나무들에게 조용히 경배를 올리며 산을 오른다. 삶과 죽음이 따로 있지 않을 한생을 그리며 산을 내린다. 해거름 산 숲 사이로 비끼는 노을빛이 곱다.♣(2019.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