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짙어갈 유월 모임에도 선생님이 꼭 참석하실 것이다. 삼십여 년 모임을 함께해오면서 먼 길을 나셨을 때 말고는 한 번도 빠지신 적이 없다. 심지어는 십여 년 지병 생활 중에서도 석 달마다 한 번씩 만나는 자리에서 못 뵌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번 모임인들 왜 거르실까. 별로 주름지지 않은 맑은 얼굴에 늘 띠고 계시는 미소와 언제나 유머 넘치는 말씀으로 좌중을 또 화기롭게 만드실 것 같다. “어서 오십시오, 선생님!”하고 말씀 드릴 겨를도 없이 먼저 와 계시던 선생님이었다. 그런 선생님이 우리와 세상을 달리하신 지 오늘이 꼭 백일 되는 날이다. 믿기어지지 않는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뵈었던 지난해 섣달 모임에서도 시국이 돌아가는 이야기며 우리 살아가는 이야기를 섞어 정정한 말씀으로 들려주셨다. 그 후 꼭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천만 뜻밖의 부음이 전해왔다. 장례식장으로 달려갔을 때는 국화꽃 속에 영정이 되어 제단에 앉아계실 뿐이었지만, 늘 뵐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 미소에 그 유머로 곧장 무슨 말씀이라도 하실 것 같았다. 고인 생전의 뜻을 따라 절은 삼가라기에 국화꽃만 한 송이 드리며 뜨거운 눈시울만 드리운 채 망연히 서서 뵐 뿐이었다. 자리에 누운 지 일주일 만에 기세하셨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병고를 오래 겪지 않으신 것은 외려 다행이라 할까.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세월을 선생님과 인연을 함께했다. 처음에는 교직을 연으로 하여 선배요 상사 선생님으로 뵙게 되었지만, 이십여 년 전부터는 문학의 길을 함께 걷는 또 하나의 연을 얻어 글 모임도 함께하면서 많은 말씀들을 나누고 들었다. 어떤 인연으로서든 선생님은 늘 베풀어주시려 하고 이해와 사랑으로 안아 주시려 하셨다. 무슨 청을 드려도 물리치시는 법이 없으셨다. 모든 이들에게 그러하신 것과 같이 나에게도 각별하셨다. 그렇게 인연이 깊어 가고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교육계에서도 문학계에서도 찬연한 공업을 쌓으시게 된다. 교육계에서는 교육전문직으로 오래 봉직하시면서 특별한 사명감으로 특수학교 경영을 자원하시기도 했다. 한 학교를 넘어 한 지역 교육을 책임지기도 하시며 그 공덕을 기리는 상도 받으시고, 최고의 명문 학교에서 모든 이들의 존경 속에 훈장을 어깨에 걸고 영예롭게 퇴임하셨다. 퇴임 후에도 사회교육, 평생교육에 뜻을 모아 대중 강의를 비롯한 여러 가지 활동을 이어나가셨다. 
선생님은 대학 4학년 때(1958) 체신부에서 공모한 노래 가사 「우체부 아저씨」가 당선되어 전국적으로 불리어지기도 했고, 이후 많은 학교의 교가를 짓기도 했으며, <구미시민헌장>의 초안을 작성(1983) 하시기도 했다. 수필 문학에 정진해오시면서 『보랏빛 수국이 피던 날』(1997)을 비롯한 네 권의 수필집을 내시면서 서정성 짙은 수필을 많이 쓰셨고,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죽임을 당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512)의 의로운 생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삶을 장편소설로 구성한 『탁영금(濯纓琴)』(2012)을 펴내셨고, 크고 작은 문학단체에 참여도 하고 책임도 맡아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시면서 여러 가지 문학상을 받으시기도 했다. 선생님의 교육과 문학도 존경스럽지만, 언제나 명랑하고 너그럽고 모든 이들을 진정으로 대하셨던 그 인품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말처럼 선생님과 연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 인품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가신 지 백일을 맞는 오늘따라 선생님이 더욱 그립다. ‘사람 그리운 마음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하는 것을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다시 헤아려본다. 그리운 이를 찾아간다. 어느 촌락 길로 들어 좁은 산길을 오른다. 중턱에 이를 무렵 맨살의 흙이 나타나고, 평평한 그 흙 위에 두어 자 폭도 되지 않을 조그만 빗돌로 앉아 계신다. 첫 수필집 제호처럼 ‘보랏빛 수국’을 드리고 싶었는데, 제 철이 아니라 구할 수가 없어 책과 함께 하얀 국화꽃 몇 송이를 묘비 앞에 놓았다. 장례식장에서 못 바친 절을 드리며, ‘그리움’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분이여! 하고 조용히 외친다. 오직 ‘+집사 견일영의 묘 1935.03.23.~2019.1.13.(양)’이라고만 새겨진 빗돌 하나뿐인 유택도 선생님의 유지에 따른 것이라 한다. ‘집사’로도 사셨겠지만,선생님의 생애가 이 한 마디에 다 담길 수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명치를 치고 올라온다. 혈친들인들 그 생애를 어찌 속속들이 헤아릴 수 있을까. 선생님만의 일이 아닌 것 같아 짙은 설움덩이가 다시 속을 치는 것 같다. 내 마음속에서라도 빗돌을 하나 더 세워야 할 것 같았다. 선생님은 교육자로도 문학인으로서도 모두 훌륭한 삶을 사셨지만, 선생님의 고아한 문학의 향기가 더욱 그립다. 그 빗돌은 송백조(松柏操)와 인(仁)을 기리는 신념이 담긴 아호를 넣어 ‘솔뫼 견일영 문학비’라고 해야 할 것 같다.그 비의 앞쪽에는 한 구절이라도 선생님이 쓰신 글을 새겨야 할 것이다.내신 책들, 쓰신 글들을 상기해본다. 그래, 이거다. 맨 나중에 낸 수필집,탁영의 인품을 기려 소설로까지 쓰시고 다시 그를 우러러 「거문고, 여섯 줄의 조화」라는 글을 쓰시지 않았던가. 선생님의 중요한 정신세계가 여실히 드러나 있을 그 끝 구절을 새기고 싶다. “……나는 거문고 여섯 줄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자세를 바로잡아 본다. 내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가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속도감을 잊어야 한다. 아직 내 가슴의 여섯 줄은 조율이 맞지 않아 어설픈 소리만 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다짐한다. 천년 묵은 오동나무에서도 거문고 소리를 간직하며 절의를 지키고 있는데 혹시 내가 세습을 핑계 삼아 추운 날 매화 향기를 팔고 다니고 있지 않는지, 느슨한 마음을 더욱 단단히 묶어놓아야 하겠다.” 선생님은 결코 속도로 세상을 달려오지 않으셨다. 오직 ‘정(情)’과 ‘의(義)’로 사셨을 뿐이다. 선생님의 거문고는 언제나 조화로운 소리를 내셨다. 그렇다. 그 빗돌 뒤쪽에는 그 생애를, 날이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던 그 삶을 적는 것이다. 내 마음속일 뿐이지만, 그 비석 하나 세우고 나니 설움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이제 선생님이 그리울 때는 그 빗돌을 안아야겠다. 뜨겁게 부둥키고 싶다. 그리고 이제 마음을 더 묶지 않으셔도 된다고, 다 풀어놓으셔도 된다고 외람된 말씀을 드려야겠다. 그 작은 빗돌에 배례를 드리고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지만, 마음속의 빗돌을 다시 보듬으며 걸음을 추슬러 산을 내려온다. 다시 뵐 날을 그리며 돌이켜지는 발길을 애써 돌리며 내려온다. 다음 모임에도 잘 오십시오. 그리운 견일영 선생님-.♣(2019.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