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외고 듣고 하는 것이 좋아 뜻 맞는 사람들끼리 만든 모임이 있다. 모여서 낭송을 서로 주고받기도 하고, 한 해 한 번쯤은 무대도 열면서 함께 낭송을 즐겨온 지도 어느새 강산이 바뀔 세월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내 머리와 가슴속에서는 수많은 시들이 명멸해갔다. 조병화의 시, 이를 테면 「늘, 혹은」, 「서로 그립다는 것은」 과 같은 시도 애송하고, 계절에 따라 「봄의 금기 사항」(신달자), 「여름 속으로」(윤수천), 「가을이 아름다운 건」(이해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백석) 등을 즐겨 외면서 그리움으로 가슴을 일렁이기도 하고, 계절의 꽃보라를 아련히 날려보기도 한다. 시를 외다 보면 좋은 시는 물론 가슴 깊숙이 들어와 박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기도 하지만, 시 하나가 많이 익었다 싶으면 새로운 시를 찾아 음미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또 어떤 시에 잠겨 볼까. 시집을 찾기도 하고 웹 세상을 탐색도 하며 가슴을 녹일 만한 시들을 눈여겨 찾는다. 그렇게 시를 찾아 헤매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시 하나를 발견한다. 늘 그리워만 하던 사람을 어느 길거리에서 문득 해후한 반가움 같은 마음이다. ‘문득’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별안간 만난 것은 아니다. 여러 시들을 읽어가는 사이에 내 삶 속으로 깊이 이입되어 오는 느낌이 간절히 젖어들 때 시가 ‘발견’되는 것이다. 내가 새로 찾은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 그대와 나/ 돌아갈 길 가늠하지 않고 /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장석주,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그 첫머리를 읽는 순간 참 ‘멀리까지’ 온 내 삶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 내 삶도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렸구나! 쏟아진 삶이 일순간 눈앞에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 ‘삶’이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생태의 그 삶이기도 하고, 삶 속에서 인연을 맺었던 숱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내 삶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 나를 거쳐 흘러갔듯,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다. 그 중에서, 흘러가고 남은 물과 사석이 강의 풍경을 이루듯이 남은 삶과 사람이 오늘 나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닐까. ‘그대와 나’, ‘그대’는 나의 삶 그 자체일 수도 있고, 내 삶 속의 사람일 수도 있다. ‘돌아갈 길을 가늠’할 겨를이 어찌 있었으랴. 사노라 분망해서 돌아볼 겨를이 없기도 했을 것이고, 그 품에 너무 깊숙이 잠겨 ‘돌아갈 길’을 망각해 버렸던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이제 시가 나를 일깨워주는구나. 그렇게 이리 멀리까지 와버렸다는 것을-. 다음 구절이 나를 깊은 처연 속으로 내려앉게 한다.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만을 /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별의 궤도를”꿈인 듯 깨고 보니 다시 돌아갈 길이 없다. 구두도, 차도 이미 나를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다. 돌아갈 길 바이없다. 오직 바라볼 수 있는 건 ‘그대’뿐이거늘, 그대마저 글썽이는 눈물로 서있구나. 그 눈물은 내가 나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지. 내가 닦아준들 잦아질 눈물이런가. 그래도 오직 그대 눈동자만이 나의 희망이다. 눈동자 속에 새겨진 그 희망의 궤도만이 내가 다다 의지할 수 있는 길일뿐이다.내 삶이여, 그대여! 어쩌랴!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들 / 이제 와서 어쩌랴” 다시 돌아갈 길은 이제 끊겨버렸지 않은가.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던가. “우리 인생은 너무 무겁지 않았던가 / 그 무거움 때문에 / 우리는 얼마나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였던가” 돌아보면 참으로 무겁게도 퍼덕거렸지. 이제 우리에게 다시 퍼덕일 날개가 있는가. 퍼덕여 날 수 있는 또 다른 하늘이 있는가. 시는 끝까지 위안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의지의 날개를 접지 않는다. “더 이상 묻지 말자 /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 묻지 말고 가자 / 멀리 왔다면 /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물어서 어쩌겠는가.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운명을 알 수 있다면 비껴가기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비껴갈 수 있다면 이미 내 운명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내 삶이여,그대여! 묻지 말고 가자. 이대로 이냥 가자. 우리 멀리 왔다면 더 멀리 끝도 없이 가버리자. 아득한 운명 앞에서 자포와 허탈에 빠진 건가. 결코 아니다. 승화다. 더 빛나는 길로의 치환이다. 한없이 가버릴 때, 우리가 도달한 그곳에 더욱 찬연한 우리의 삶이 있지 않으랴. 시의 몸말은 보여주지 않는다. 몸말 어디에도 그 승화된 삶의 비밀을 갈무리해 두지 않았다. 미리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너무 멀리까지 와버린 그 삶의 머리에서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승화될 것이지 않은가. 내 삶이여, 그대여! 그 시를 읽는 순간 고압의 전류에라도 감전된 듯했다. 잠시 혼몽에 빠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시가 내 속으로 들어온 건지, 내가 시 속에 빠진 건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내일 아침에 또 내 삶을 만나면, 그대를 다시 만나면, 다듬어진 목청으로 낭랑히 들려주리라며 지성을 다해 외운다. 한없이 더 멀리 가버릴 우리의 삶을 위하여, 시 외며 사는 내 삶을 위하여 오롯이 읊조린다. 우리에게 올 더 좋은 날을 바라며-. ♣(2019.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