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시 외는 삶(7)

이청산 2019. 3. 20. 12:43

시 외는 삶(7)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시를 외고 듣고 하는 것이 좋아 뜻 맞는 사람들끼리 만든 모임이 있다모여서 낭송을 서로 주고받기도 하고한 해 한 번쯤은 무대도 열면서 함께 낭송을 즐겨온 지도 어느새 강산이 바뀔 세월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내 머리와 가슴속에서는 수많은 시들이 명멸해갔다조병화의 시이를 테면 혹은서로 그립다는 것은」 과 같은 시도 애송하고계절에 따라 봄의 금기 사항(신달자), 여름 속으로(윤수천), 가을이 아름다운 건(이해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백석등을 즐겨 외면서 그리움으로 가슴을 일렁이기도 하고계절의 꽃보라를 아련히 날려보기도 한다.

시를 외다 보면 좋은 시는 물론 가슴 깊숙이 들어와 박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기도 하지만시 하나가 많이 익었다 싶으면 새로운 시를 찾아 음미하고 싶어지기도 한다또 어떤 시에 잠겨 볼까시집을 찾기도 하고 웹 세상을 탐색도 하며 가슴을 녹일 만한 시들을 눈여겨 찾는다.

그렇게 시를 찾아 헤매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시 하나를 발견한다늘 그리워만 하던 사람을 어느 길거리에서 문득 해후한 반가움 같은 마음이다. ‘문득이라고 했지만사실은 별안간 만난 것은 아니다여러 시들을 읽어가는 사이에 내 삶 속으로 깊이 이입되어 오는 느낌이 간절히 젖어들 때 시가 발견되는 것이다.

내가 새로 찾은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돌아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장석주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그 첫머리를 읽는 순간 참 멀리까지’ 온 내 삶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그래내 삶도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렸구나!

쏟아진 삶이 일순간 눈앞에 파노라마로 펼쳐진다그 이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생태의 그 삶이기도 하고삶 속에서 인연을 맺었던 숱한 사람들이기도 했다내 삶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 나를 거쳐 흘러갔듯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다그 중에서흘러가고 남은 물과 사석이 강의 풍경을 이루듯이 남은 삶과 사람이 오늘 나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닐까.

그대와 나’, ‘그대는 나의 삶 그 자체일 수도 있고내 삶 속의 사람일 수도 있다. ‘돌아갈 길을 가늠할 겨를이 어찌 있었으랴사노라 분망해서 돌아볼 겨를이 없기도 했을 것이고그 품에 너무 깊숙이 잠겨 돌아갈 길을 망각해 버렸던지도 모를 일이었다이제 시가 나를 일깨워주는구나그렇게 이리 멀리까지 와버렸다는 것을-.

다음 구절이 나를 깊은 처연 속으로 내려앉게 한다. “구두는 낡고차는 끊겨버렸다. /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그대 눈동자만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별의 궤도를꿈인 듯 깨고 보니 다시 돌아갈 길이 없다구두도차도 이미 나를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다돌아갈 길 바이없다.

오직 바라볼 수 있는 건 그대뿐이거늘그대마저 글썽이는 눈물로 서있구나그 눈물은 내가 나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내가 닦아준들 잦아질 눈물이런가그래도 오직 그대 눈동자만이 나의 희망이다눈동자 속에 새겨진 그 희망의 궤도만이 내가 다다 의지할 수 있는 길일뿐이다.내 삶이여그대여!

어쩌랴!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들 이제 와서 어쩌랴” 다시 돌아갈 길은 이제 끊겨버렸지 않은가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던가. “우리 인생은 너무 무겁지 않았던가 그 무거움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였던가” 돌아보면 참으로 무겁게도 퍼덕거렸지이제 우리에게 다시 퍼덕일 날개가 있는가퍼덕여 날 수 있는 또 다른 하늘이 있는가.

시는 끝까지 위안의 끈을 놓지 않는다의지의 날개를 접지 않는다. “더 이상 묻지 말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묻지 말고 가자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물어서 어쩌겠는가.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운명을 알 수 있다면 비껴가기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비껴갈 수 있다면 이미 내 운명이 아니지 않는가그러니 내 삶이여,그대여묻지 말고 가자이대로 이냥 가자우리 멀리 왔다면 더 멀리 끝도 없이 가버리자아득한 운명 앞에서 자포와 허탈에 빠진 건가결코 아니다승화다더 빛나는 길로의 치환이다한없이 가버릴 때우리가 도달한 그곳에 더욱 찬연한 우리의 삶이 있지 않으랴.

시의 몸말은 보여주지 않는다몸말 어디에도 그 승화된 삶의 비밀을 갈무리해 두지 않았다미리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너무 멀리까지 와버린 그 삶의 머리에서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그렇게 승화될 것이지 않은가내 삶이여그대여!

그 시를 읽는 순간 고압의 전류에라도 감전된 듯했다잠시 혼몽에 빠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시가 내 속으로 들어온 건지내가 시 속에 빠진 건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내일 아침에 또 내 삶을 만나면그대를 다시 만나면다듬어진 목청으로 낭랑히 들려주리라며 지성을 다해 외운다한없이 더 멀리 가버릴 우리의 삶을 위하여시 외며 사는 내 삶을 위하여 오롯이 읊조린다.

우리에게 올 더 좋은 날을 바라며-. (2019.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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