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도 오월인가

이청산 2019. 5. 23. 15:14

나도 오월인가

 

오월은 생동하고 있다모든 것들이 넘치는 생기로 천지를 요동하게 하고 있다그 생기의 빛깔은 진초록이다초록보다 더 진한 진초록에는 빛깔의 심도만큼이나 힘찬 생명의 박동이 울리고 있다오월은 울림의 계절이다.

오월의 산은 온통 그 박동 소리로 가득 차 있다오월의 산을 오르자면 눈보다는 귀를 더 크게 열어야 한다세고 여린 박자를 섞어가며 들려오는 그 소리는 박진감 있는 행진곡 같기도 하고웅혼한 교향곡 같기도 하다.

그 행진곡에 발맞추며 그 교향곡에 가슴을 펴고 산을 오르다 보면 몸도 어느새 그 박동 소리에 젖어버린다산이 울려내는 소리와 내 심장의 소리는 하나가 된다저 잎새 저 빛깔이 어찌 저리 부시도록 푸른가마치 내 몸이 내는 빛깔인 것 같다.

오월은 살고 싶은 계절이다어떻게 살아도 푸르러질 것만 같다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앉아도 누워도 어떤 몸짓을 부려도 마냥 생기를 더해갈 것만 같다저 엽록소가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다오월은 삶의 계절이다.

이 오월에 그리움은 또 어인 일인가무언가를 잃어버린 듯도 한 계절이다그 잃어버린 것이 그립다그것은 어디에 가 있을까.무엇을 하고 있을까그런데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무엇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르는 상실감이 그리움을 더 간절하게 한다.

오월은 이리 박동하고이리 푸른데나도 오월인가오월처럼 살고 있는가오월처럼 산 적이 있었던가있었을 것이다그 박동이 있었기에 시간의 산을 넘고 세월의 강을 건너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는가그래서 지금은 한 생애를 정리하고 새롭게 살고 있다 하지 않는가.

그 정리가 무엇이었을까보낼 것은 보내었다는 뜻일 것이다보낼 것은 다 보내고 남은 것을 부여잡고 살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그렇다.보내야 할 것은 모두 보내었다내 스스로 보내었든 누가 가져갔든 모두 보내었다아니지금도 보내면서 살고 있다.

그 보낸 것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아쉬워하면서도 보내고 무심히 보내기도 했을 것이련만그 속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있었을 것이다애증이며 호오고락이며 희비가 날줄씨줄로 짜이기도 하고 무람없이 얽히고설키기도 했을 모든 것들이겠다.

그것들은 지금 어디서 어찌하고 있을까누구를 그리며 무엇을 바라며 어떤 하늘을 보고 있을까가끔씩 그것들이 다시 보고 싶어지는 마음은 무엇일까미련이야 없다 할지라도그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할지라도-.

온 산을 행진곡으로 들썩이게 하고 우람한 교향곡을 연주해 내는 저 오월의 나무들에게도 그리움이라는 게 있을까돌아 보이는 애틋한 날들이 있을까저 푸름의 박동 속에는 그 마음이 들어앉을 틈이 없을 것 같다틈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저 나무인들 돌이킬 수 있는 날이 왜 없을까저 푸름이 빛깔을 바꾸어가다가 마침내는 한 톨의 흙으로 돌아갔던 기억이며떨어진 씨앗을 고이 품었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온 일이며혹은 사나운 비바람을 만나 모진 고초를 겪었던 아픔들이 왜 없을까.

오월은 그 모든 것을 씻어버린다모든 것이 새롭다저 나무들은 해마다 맞는 오월로 모든 것을 씻는다그리고 새로운 박동으로 힘찬 울림을 구가한다저들에게는 오직 요동하는 생명의 합창소리만 있을 뿐이다.우렁찬 울림이 박동할 뿐이다.

이 오월 앞에서 나는 무엇인가나도 이 오월이 될 수 있을 것인가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다만 이 오월을 바라보며 지난 오월을 그리워할 수 있을 뿐이다지금 나는 함께 하나가 될 수 없는 오월 앞에서 오월을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서있을 뿐이다.

비록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오월이지만그래도 오월은 즐겁다오월은 기쁘다이 푸름 앞에서이 요동하는 생명들 속에서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일찍이 노 수필가께서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나는 오월 속에 있다.”(피천득오월)라 하신 말씀이 다시 새롭다그렇다이 오월 앞에서 쌓여져 있는 지난 세월을 돌이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오월이 있다는 것이이 오월 속을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풋풋한 일인가내게는 오지 않을 오월이 와서 나를 감싸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짙어져 가는 푸름을 따라 함께 푸러져 볼 일이다얼싸안아 볼 일이다그렇게 몸과 마음을 추스르다 보면 나도 오월이 될 수 있지 않으랴되지 않으랴.

나도 오월인가나도 오월이다오월 속을 사는 나는 분명코 오월이다.

오월의 어느 푸른 날 속에서-.(2019.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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