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봄은 먹먹하다

이청산 2019. 4. 22. 14:47

봄은 먹먹하다

 

사계절 중에서 봄이 시 쓰기에 가장 좋다며 봄 시를 많이 쓴 어느 시인은 봄바람 없이무슨 꽃이 아름답고봄바람 없이무슨 잎은 생기를 돋우며봄바람 없이무슨 새가 울겠느냐// 그 많은 소문은누가 있어 퍼뜨리나”(김형영화살시편4-소문)라며 봄을 노래했다고 한다.그 봄바람이 시인에게 생기를 돋게 하고 가슴을 울게 했단 말인가.

그 시인의 마음은 그럴지라도 나의 봄은 먹먹하다나는 봄이면 글쓰기가 어렵다초봄의 가녀린 햇살이 내릴 무렵 땅에 납작 잎을 붙이고 있던 봄까치꽃이 앙증맞은 꽃을 쏘옥 내밀며 새봄의 첫 꽃으로 피는 걸 보면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가슴이 먹먹하다꽃다지냉이꽃현호색광대나물꽃제비꽃……잇달아 꽃이 피어나면 그 먹먹하기가 조금은 면역성을 더해가나 싶다가도 다시 또 가슴을 턱 막히게 하는 것이 있다.

땅속 깊이 잠들어 있던 상사화 잎이 내미는 촉을 보면 다시 먹먹해진다필 때를 잊지도 않고 두터운 흙을 뚫고 저리 피는 것이제 운명이 어찌될지도 모르고 저리 피어나는 것이 가슴에 빗장을 지른다꽃도 못 보고 말라 죽어가야 하는 제 운명을 알기나하고 솟는 걸까제 말라 죽은 자리에 대궁 세워 피워내는 꽃의 빛깔을 헤아리기나 하며 저리 솟구쳐 오르는 걸까.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것은 벚나무의 행신이다시커먼 몸뚱이가 저려들고 살갗이 터지고 갈라지고 하는 것도 모르고 애오라지 꽃에만 몰두하면서 아직 포근치 않은 바람 속에서 망울을 시나브로 키워가는 모습이 나를 먹먹하게 한다그 몰두가 헛되지 않아 어느 날 무슨 포화라도 터진 것처럼 일시에 해사하고 화사한 꽃들을 현란하게 터뜨린다피어난 꽃은 찬연했고 보는 이를 환희롭게 했다편시간의 일이었다.

어떻게 피운 그 꽃인데 왜 한 열흘을 온전히 못 가는가어느 날 아침 그 꽃잎들은 간다는 말도 옳게 남기지 않고 허공을 어지러이 그으며 보라가 되어 속절없이 져간다아직 봄은 적이 남았는데어찌 그리 걸음을 재촉한단 말인가누구는 지는 꽃을 바라보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이형기낙화)라 했지만나는 그저 먹먹할 뿐이다.

위안은 있다왕벚꽃 저리 져갈 때 뒷산의 산 벚꽃들은 이제야 긴 잠에서 깬 듯 꽃을 터뜨리기 시작한다희끗희끗 해사한 낯빛으로 산을 찬연히 수놓는다그나마 다행이다이 산벚꽃이 들판의 풀꽃들과 함께 어울리는 정경을 두고 또 누구는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그저 마음 깊은 그 사람과 나란히 봄들을 바라보아라 멀리는 산 벚꽃들 은근히 꿈꾸듯 졸음에서 깨어나고 들녘마다 풀꽃들 소근소근 속삭이며 피어나며”(신달자봄의 금기사항)라 했다봄엔 왜 사랑을 고백하지 말라 하는가모를 일이다거저 먹먹하기만 하다.

어찌하였거나 풀꽃들은 제철을 만났다논두렁 밭두렁엔 노란 꽃다지며 민들레하얀 냉이꽃이 한 가득이다.냉이도 하나가 아니다참냉이말냉이갓냉이좁쌀냉이황새냉이싸리냉이거기에 보라색 제비꽃이며 하늘빛 앙증맞은 봄까치꽃이 어우러지면 두렁은 한바탕 꽃 잔치판을 이룬다봄은 얼마나 아리땁고도 생기로운 계절인가.

그 무렵 농부들은 논을 갈고 밭을 일군다그 손길로 겨울잠을 자던 흙들도 입 벌려 큰 하품하며 맑은 민낯을 내민다흙이 봄볕을 좀 쬈다 싶으면 농부의 걸음은 보()로 향한다보를 치고 틔우고겨우내 마른 봇도랑에 물을 내린다봄은 꽃도 피는 철이지만 물도 피어나는 철이다.봇도랑에 물이 흐르면 곧이어 못자리가 만들어지고 논에는 모가 그득,밭에는 모종이 종종-. 어찌할까그 즈음 농부의 눈에 아주 미욱한 눈엣가시로 보이는 게 있다.

저 많은 풀꽃들농부들의 손아귀에 작살나지 않으면 안 된다기계로 쳐 날리든 약으로 말려버리든 저 성가신 것들 두고 볼 수가 없다두렁의 풀꽃과 농부는 어찌 그리 천적지간인가제 운명이 어찌될지도 모르면서 한껏 봄날의 생기를 자랑삼는 저 두렁 꽃이 가슴을 먹먹하고 아리게 한다.

날마다 아침 강둑 산책길을 오늘도 거닌다.줄지어 선 벚나무야 언제나 그대로지만 어제의 현란했던 그 나무가 아니다그렇게 애써 피운 꽃들은 다 어디로 날려 보냈단 말인가.꽃의 기억은 까맣게 잊은 듯 파란 잎사귀들을 쏙쏙 돋우어내고 있다둑 위의 나무야 철을 어떻게 살아가든 강물은 하늘만 담을 뿐 아무 말 없이 흐르고만 있다저 무심히 흐르는 봄 강물이 또한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봄은 피는 것도지는 것도흐르는 것도 모두 먹먹하다또 한 봄이 피고또 한 봄이 지고-. 모두가 먹먹할 뿐이다이 먹먹한 봄은 글쓰기가 참 어렵다무어라 써야 하랴어찌 써야 하랴.

봄에는 글을 쓸 수가 없다.(2019.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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