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있다. 꽃이 피고 있다. 겨울이 아무리 지난해도 봄은 어김없이 온다. 제 때를 알아 오는 봄은 꽃을 데려 오는 것이 저의 할 일인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 봄은 꽃을 피울 푸나무들을 섶에 싸서 오거나 손을 잡고 데려온다. 봄을 따라온 꽃의 밑씨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차근차근 발을 내려 꽃을 피워내기 시작한다.봄이 그렇게 시켰던가. 누가 짜준 시간표였던가. 꽃들은 제 피는 순서를 욕심내지 않는다. 익고 녹는 봄을 따라 차례대로 하나하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들에는 조그만 봄까치꽃이 가장 먼저 앙증맞은 얼굴을 내밀고, 꽃다지며 광대나물, 냉이꽃들이 뒤를 잇는다. 산에는 봄의 전령사인 듯 다른 것에 앞서 생강나무가 먼저 노란 꽃을 톡톡 터뜨려내고, 올괴불나무 꽃이 가는 가지에 초롱처럼 꽃을 송송 달다가 개나리, 진달래에게 순서를 넘긴다. 들과 산만이 아니라 마을에서도 한바탕 꽃 잔치판이 벌어진다. 매화며 살구꽃이 꿀잠에서 깨어난 듯 방긋한 미소로 애초롬한 꽃을 피워내는가 싶더니, 어느 익은 봄날 아침에는 해사하고 화사한 벚꽃이 마치 기총소사라도 받은 듯 한꺼번에 온 강둑을 휘덮어버린다.
저 꽃들은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재 때를 결코 어그러뜨리지 않으면서 저리 귀애에 찬 모습으로 피어나는 것일까. 그걸 두고 연구가들은 ‘가온량(加溫量)’에 따라 피는 순서가 정해진다고 하는 모양이다. 꽃을 피우려면 일정 수준의 따뜻한 날씨가 필요한데, 꽃에 따라 온기를 좀 덜 받아도 필 수 있는 것이 있고, 따뜻한 기운을 흡족히 누려야만 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개나리는 가온량 84.2도, 진달래는96.1도, 왕벚나무는 106.2도에서 핀다고 한다.말하자면 개나리는 온기를 좀 덜 받아도 벚꽃보다 일찍 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꽃은 새로 돋는 가녀린 풀에서나 우람한 노거수에서나 세세연년 철을 거르지 않고 피어난다는 걸 일러주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아침도 강둑길을 걷는다. 날마다 걷는 나의 산책길이다. 길섶에는 꽃다지며 말냉이꽃이 한창이다. 제비꽃이며 현호색도 간간히 보인다. 얼핏 보니 줄지어 선 왕벚나무 가지도 어제 안 보이던 빛깔이 얼비치는 것 같다. 눈여겨보니 망울들이 꽃을 피우려고 부풀어지기를 한창 애쓰고 있는 중이다. 성질이 급한 것은 망울을 시나브로 벌려가고 있는 것도 보인다. 해마다 피는 꽃이건만 볼 때마다 꼬물대는 저 망울처럼 마음이 꼬물거린다. 
사는 일에 바쁜 대처의 친한 이에게 이 강산 봄소식을 전해주어야겠다 싶어 곧 터질 것 같은 꽃망울을 폰 카메라에 담아 에스엔에스로 띄운다.잠시 후에 답을 보내왔는데, 나도 모르게 눈자위가 올라가면서 한참 잔웃음이 지어진다. 어디서 빌려온 말일까, 자신의 이야기일까. 그 답은 이러했다. “만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 제가 어머니께 여쭈었습니다. /해마다 봄이 오고 꽃이 피는데 / 왜 인생의 봄과 꽃은 어찌 한 번뿐일까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 한 번 피는 것도 머리 아픈데 / 또 피면 우얄라카노!” 마치 시처럼 적어 보냈다. 시였다. ‘또 피면 우얄라카노!(어찌하려 하느냐!)’라는 말씀의 여운이 전류처럼 찌릿하게 전해져온다. 해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피는 꽃을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 다시 필까봐 걱정하는 모습이 우습고도 눈물겹다. 예로부터 ‘春草年年綠 王孫歸不歸’라 하여 해마다 푸러지는 봄풀과는 달리 한번 가고는 다시 올 줄 모르는 인생을 한탄하기도 하고, 늙음과 나이를 멀리하고 물리치고 싶어 하는 노래를 오늘날의 유행가들도 애잔히 읊어내고 있는 것하고는 사뭇 다른 심사다.
사람에게는 봄꽃처럼 다시 꽃필 날이 정녕 없는 것일까. 사실, 다시 꽃 피기를 원하기에는, 피어서 다시 무성해지기를 바라기에는, 또다시 겪고 치러내야 할 생애의 간난과 신산들 앞에서 마음을 쉬이 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우얄라카노’ 어머니의 그 마음을 두고 고개를 저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는 일이 마냥 재미나고 즐겁기만 한 인생들이 얼마나 될까. 그 고단한 삶 속에서 봄꽃은 오히려 위안이다.살면서 해마다 피는 이 봄꽃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지 않은가. 쉽게 어루만져지지도 않고 쉽사리 매듭지어지지도 않을 간고한 삶을 살면서, 때 되면 잊지 않고 찾아와 지치고 애옥한 심신을 달래주는 저 봄꽃이 얼마나 미쁜 것이던가.
봄꽃은 제 몸에만 꽃을 피우는 게 아니다. 제 꽃으로만 강산을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보는 이의 마음에도 꽃이 피게 한다. 그 마음속에 꽃술을 심어 모두 꽃이 되게 한다. 그리하여 강도 산도 사람도 모두 꽃으로 어우러지게 한다. 때맞추어 피는 꽃을 보다가, 즐기다가, 어우러지다가 때 되어 떠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그렇게 떠난 이들은 어디로 가는가. 봄이 되고 때가 되면 화사하게 피어날 꽃을 즐기는 이들로 다시 태어날 것이 아닌가. 봄은 모든 것이 꽃이고 모두가 꽃이다. 피는 꽃을 보며 모든 것이, 모두가 꽃이 되는 것이다. 꽃처럼 해마다 꽃으로 피다가, 꽃처럼 지고 열매를 맺다가, 꽃처럼 다시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우얄라카노’ 어머니! 아파하지 마세요. 바로 지금 당신이 꽃입니다.이 꽃피는 봄 따라 피어나고 있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어머니!♣(2019.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