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탄 지는 수십 년 되었지만 운동 삼아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한 것은 한촌살이 이후다. 강산이 바뀔 세월을 앞두고 있는 한촌살이에서 처음에는 생활의 편리를 위해 타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몸과 마음을 다듬는 긴요한 수단이 되어 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고 건전하게 걸우어 보겠다며 산수 좋은 곳을 찾아와 한촌살이를 하고 있다. 집 뒷산을 오르는 일을 건강 보전의 주요 수단으로 삼아 날마다 해거름이면 쌍지팡이를 짚고 뒷산을 올랐다. 오르기를 거듭하는 사이에 산은 운동 공간만이 아니라 심신을 맑히는 정서적인 터전으로 다가왔다. 자전거도 타다 보면 그런 심신의 변화가 오지 않을까. 농협이며 우체국을 가고 이웃마을에 나들이할 때만이 아니라 나의 운동 방법으로 삼아 보면 어떨까. 그때 마침 나라의 정책으로 많은 곳에 자전거 길을 만들고 있었는데, 내 사는 마을 앞에도 벚나무 우거진 강둑을 따라 자전거길이 트였다. 달려 나갔다. 시원하게 펼쳐지며 안겨오는 갖가지 풍정들도 달리는 마음을 즐겁고도 유쾌하게 했지만, 관절이나 근육에 큰 부담을 주지 않는 유산소 운동으로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비만 등과 같은 성인병을 다스리는데도 도움이 된다 하니, 나 같은 사람이 꼭 해야 할 운동 같았다. 그런 신체적인 환경이며 병들에 무관심할 수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산을 오르고 하루는 자전거를 달리기로 작정을 세우고 그렇게 오르고 달리다보니 그 세월도 수년이 흐른 지금은, 모두 떼어낼 수 없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오늘도 상쾌하게 자전거를 달려 나간다. 자전거를 달려 나가는 거리만큼이나 즐거움도 불어나는 것 같았다. 시원하다. 안겨오는 바람은 몸만이 아니라 머릿속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한다. 달리는 순간만은 어지러운 세상 소식도, 아내의 잔소리도 다 떨쳐버릴 수 있다. 그런 것들은 숫제 내 속에 들지를 못한다. 마치 숲속에 들어 바람소리 새소리를 들을 때처럼 청량해진다. 달리면서 내 속을 터져 나오는 숨소리가 또한 나를 즐겁게 한다. 무슨 뿌듯한 일을 하고 뿜어내는 숨소리 같다. 들숨을 쉴 때는 세상의 청신한 바람이 다 내 속으로 드는 것 같다.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삶이 늘 이렇게 경쾌할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어쩌다 보니 몇 가지 심혈관 이상을 안게 되었다. 이렇게 달리다 보면 몸속을 흐르고 있는 핏줄인들 가만히 있을까. 저들도 경쾌하게 춤을 추고 있을 것 같다. 그 춤의 박동이 몸을 출렁이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럴 때면 몸은 흥겨운 음정과 박자로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다. 허리가 어떻다고? 이렇게 피돌기가 흥겨운 춤을 추는데 허린들 제 박자를 못 맞출까. 다리도 흥에 겨워 물오른 봄 나무처럼 힘을 돋워 낼 것 같다. 내 허리며 다리는 신나게 굴러가고 있는 바퀴를 내려다보며 신명이 나 페달을 더욱 힘차게 밟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자전거에는 세상의 많은 풍경들이 속도감 있게 안겨 온다. 흐르는 강물도, 나는 구름도 가벼이 안겨 오고, 풀꽃도 나비도 정겹게 안겨 온다.해사한 벚꽃도 화사한 단풍도 안겨 오고, 논두렁도 밭이랑도 따뜻하게 안겨 오고, 푸른 초원도 황금 들판도 시원스레 안겨 온다. 자전거 바퀴 속에는 세상이 다 들어있는 것 같다. 자전거 달리기는 세상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다. 나는 자동차 운전을 안 하고 못한다. 따라서 내가 자동차를 탄들 그것은 저의 속도지 내가 내는 속도는 아니다. 자전거는 내가 즐기며 달릴 수 있는 최고의 속도감을 준다. 그 속도감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별로 속도 있게 살아오지 못한 내 삶의 이력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무슨 일에서든 남보다 빠르게 해본 적도, 남을 앞질러 본 적도 별로 없이 살아왔다. 그리 느릿하게 사는 것이 내 모습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 이 자전거가 일찍이 느껴보지 못했던 속도감을 나에게 안겨주니 얼마나 즐거운가. 사실은, 속도감에 그리 탐닉하는 것은 아니다. 빠른 속도가 내 체질과 어울린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다만 범상하기 짝이 없는 내 삶에 조금의 변화감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 자전거 타기가 마냥 쉽고 경쾌한 것만은 아니다. 특히 겨울이면 떨어질 듯 시린 손가락으로 핸들을 잡으며 앞을 가로막는 바람을 뚫고 살을 엘 듯한 추위 속을 달리기란 마치 극한의 생존 투쟁 같기도 하다. 그 속에서도 작은 희망은 있다. 반환점을 돌아올 때는 바람이 등을 밀어주는 호사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르막을 힘주어 오르다가 넘어져 늑골을 다쳤다. 병원 신세도 지면서 두어 주일을 비명만 삼키며 누워 있어야 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때 당시의 심정으로서는 다시는 자전거를 타지 않아야 할 것 같았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타지 말기를 강권했다. 그래도 다시 탔다. 산에 오르는 일과 함께 자전거를 타는 일도 내 삶의 한 부분일 바에야 이런 일도 내 삶이 겪어내야 하는 시련과 고통이 아니겠는가. 자전거를 타면서 겪는 어려움들도 살아가면서 맞추어나가야 하는 내 삶의 한 퍼즐이라 여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만 살아가는 모든 일이 다 그러하듯 자전거를 탈 때에도 겸허와 겸손을 잃지 말이다. 우리 삶에서 교만과 허세가 결국에는 인격에 흠이 지게 하듯, 자전거 타기의 안전에도 위험을 줄 수 있음을 다쳐보고서야 깨닫는 것은 너무 우둔한 일이다. 오늘도 자전거를 달려 나간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이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움직여야 한다.”라고 했다던가. 이렇게 달려 나가는 일도 삶의 한 축도라 생각하며 내 힘에 맞게 큰 욕심 내지 않고 즐겁게 움직여 나갈 일이다. 이 공중을 나는 바람 소리가 얼마나 삽상한가. 저 하늘에 피어오르는 흰 구름이 얼마나 쾌활한가. 이렇게 달려 나갈 수 있음이 내 살아 있음의 얼마나 박진감 있는 증거인가.♣(2019.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