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아버지의 옛 사진을 보며

이청산 2018. 10. 31. 14:05

아버지의 옛 사진을 보며

 

아버지의 파란 생애를 소략하게나마 정리하여 조그만 책자로 펴내어 가형께 보냈더니, 얼마 후에 서랍 어디 깊은 곳에 있더라며 아버지의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그 전기문을 보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새로워진 모양이었다.

십여 명이서 어느 언덕배기를 배경으로 하여 함께 찍은 사진인데, 제복을 착용한 사람들도 있고,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까지 입은 사람들도 있고 ,부인네도 한 사람 보인다. 머리를 박박 깎은 사람도 있고 제모를 쓴 사람도 있었는데,아버지는 단정하게 입은 제복에 머리도 깔끔하게 손질한 모습으로 뒷줄에 앉아 계셨다.

언제 적의 모습일까. 아래 가장자리에 만주라고 적어놓으신 걸 보면 만주에서 생활하실 때 같이 지내던 동포들과 함께 찍은 것 같은데, 사진 속에는 함께 만주 생활을 하던 재종형(나의 재종숙)의 모습도 보인다.

아버지는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4월에 낙동강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5세 때인 19261월에 두 살 위이신 어머니와 결혼하신 후로 기차가 다니는 처가 곳을 보면서 신문물에 눈을 뜨시게 되어 일본으로, 만주로 출입하며 새 세상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다.

아버지는 두 번의 만주행을 결행하시게 되는데, 처음은 어머니가 신행을 오고 얼마 되지 않은 17세 때, 새색시를 홀로 남겨둔 채 만주로 떠난다. 그 때 만주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자력 성가의 꿈을 키우고 계셨던 것 같다. 한 해가 지난 다음 길림성으로 찾아간 할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를 못 이겨 집으로 돌아와서도 꿈을 결코 버릴 수 없었던 아버지는 19 2월에 다시 관부연락선을 타게 된다.

일본 생활을 통해 성가의 동력을 마련한 아버지는 삼 년의 타국 생활을 접고 집으로 돌아와 비로소 분가하여 첫딸을 얻게 되니 결혼한 지 8년만의 일이었다. 타관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 삼아 여러 가지 사업을 경영하며 생활이 안정되어 가는 듯했지만, 아버지는 현실에 안주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개척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만주행을 결행한 것은 29(1939) 정월이었다. 먼저 만주에 가있던 재종형과 함께 아버지는 만주에서 동포들을 모아 황무지를 개간하여 담배 특작을 중심으로 한 농작물을 생산하는 일을 했다. 그때 아버지는 나라 잃고 남의 땅을 찾아와 사는 고단한 동포들의 의지가 될 수 있는 호기로운 분으로 주위의 존경과 친근감을 얻고 있었다고 한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그 무렵의 모습인 것 같다. 30세를 전후한 시기일 것이다. 20세를 전후한 무렵부터 완력과 기질이 매우 강고하셨다는 아버지는 그 시기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가장 왕성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함께한 사람들은 일을 같이하던 동료들인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그 아버지를 찾아 어린 남매를 데리고 구미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 신의주를 거쳐 수천 리 길을 마다 않고 아버지를 찾아 나섰는데, 머나먼 이국땅에서 해후를 한 부부의 감격은 어떠했을까. 그 감격도 잠시, 타관 객지에서 겪어야 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고난과 시련은 상상으로 새겨볼 수 있을 뿐이지만, 그 고행 중에서 일어가는 살림살이에 오직 보람을 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에 할아버지가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귀국하여 장례를 치르고, 태중의 어머니가 둘째 딸을 낳자 소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 맏딸은 아우 집에 맡겨놓고 삼칠도 지나지 않은 핏덩이를 안고 다시 만주행 먼 길을 내닫는다.

이국땅의 거친 삶 속에서 어머니도 어린것들과 함께 아버지의 일을 바라지해야 하는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 살림살이를 돋우어 나가고 있을 때, 고향의 백부(아버지의 맏형)가 파산지경에 이르렀다는 전갈을 받고 만주 생활을 서둘러 정리하여 귀국한다. 모든 재산을 다 털어 형의 곤경을 해결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시 빈손이 되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 모습을 다시 돌아본다. 형제간에 우애는 물론 돈독해야 할 것이지만, 형제를 위해서 전 재산을 다 털어 넣을 수 있는 우애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 수 있을까. 많은 재산을 사이에 두고 다툼을 벌이고 있는 재벌가 형제의 모습을 보노라면, 남의 일 같지 않게 와 닿는 송연함이 아버지의 결단과 우애를 다시 우러러 뵈게 한다.

아버지는 그 후 해방 공간의 잔혹한 역사며 피란생활의 참혹한 고난을 겪고, 심한 신양에도 시달리며 경제적인 어려움과도 마주하게 되지만,아버지는 동기를 위해 희생한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간혹 그때 그 재물을 조금이라도 남겨두었다면 우리 아이들 고생 덜 시킬 텐데…….’하며 아쉽고도 안타까운 말씀을 할 때가 있었지만, 그때도 아버지는 다른 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 아버지의 아들들인 우리 형제도 그런 형제애를 실천하고 있는가.그것이 늘 아버지께 송구할 뿐이지만, 그럴수록 아버지의 마음이 더욱 크고 넓게 느껴진다. 언젠가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동생과 아들을 함께 상급학교에 보내야 할 처지인데, 형편이 어려워 천생 아들을 포기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그 천생이란 말을 듣는 순간 무엇에 감전된 듯 나의 누선에 찌릿한 전류가 느껴져 왔었다.왜 그랬을까.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에 이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버지가 드리웠던 뜻과 마음의 그늘을 나는 지금까지도 그리 이뤄놓은 게 없다. 한 생애를 정리한 뒤끝에서 겨우 한촌 모옥 하나 지어 한미하게 사는 일밖에, 혈육 간의 정리도 돈독하게 일구지 못한 것 같아 내 지난 한생이 소슬하게만 여겨질 뿐이다.

아버지의 옛 사진을 다시 보며 그 젊은 시절의 패기와 투지가 어린 삶을 다시 새겨본다. 그리고 그 형제애의 지순한 의지를 새삼 그린다. 아버지의 강인한 꿈과 숭고한 뜻 앞에서 내 삶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조아려본다. 아버지를 다시 뵈면, ‘저는 이렇게 살다가 왔습니다.’라며 무슨 말씀을 공읍하여 여쭈어야 할까.(201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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