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아내의 자연주의

이청산 2018. 10. 26. 13:46

아내의 자연주의

 

우리가 이 한촌을 찾아와 세간을 풀었던 것이 그리 멀지 않은 일 같은데그렁저렁 흘러간 시간들이 강산을 변하게 할 세월로 다가와 있다.고락의 한 생애를 정리하면서 아내와 마음을 모아다음 생은 모든 걸 다 털고 산 좋고 물 맑은 곳으로 가서 펼치리라 하고그런 곳을 찾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아내와 나는 한촌살이의 뜻은 같이했지만 목적은 달랐다나는 산과 물을 즐기는데 마음을 두고 있었던 데 비해 아내는 조그만 텃밭이나 가꾸어 푸성귀를 거두는 일에 재미를 걸고 있었다.이 한촌에 이른 이래 그 목적 그대로 나는 아침이면 강둑을 거닐고 해거름에는 산을 오르는 일아내는 호미를 들고 텃밭을 들락거리는 일을 일상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아내의 일을 전혀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봄이면 밭을 쪼아 골을 타서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심도록 해주는 일이며가을이면 땅 위의 것을 베거나 땅속을 뒤져 캐어 수확하는 일은 나의 몫이다그것뿐이다심고 걸우고 가꾸는 일은 신성불가침한 아내의 영역이다나에게는 손댈 겨를을 전연 주지 않는다자기의 재미를 빼앗지 말라는 것이다.

아내는 마당의 조그만 텃밭만으로는 속이 차지 않아 이웃으로부터 집 부근에 조그만 산밭 하나를 얻었다그 밭에 고추며 들깨도 심고 정구지 밭도 만들고 고구마도 조금 조금씩 심었다아내의 손길은 봄철에 특히 바쁘다밭을 조각 상보 조각 가르듯 나누어 여러 가지 씨나 모종을 사와서 묻고 심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추는 손이 많이 간다고 했다이랑에 비닐을 씌우고 모종을 심고 물을 주고 조금 자라면 지지대를 세워 묶어주어야 하는 일을 해나가야 한다또 병을 쉽게 타서 많이 열린 고추도 병들면 그만이다잘 자라기는 정구지가 제일이라 했다뿌리만 잘 건사하면 쑥쑥 잘 자라고자라는 대로 베어 먹으면 또 나서 자라주니 참 기특한 푸성귀라 했다.

심고 걸우고 가꾸는 철이 가고 가을이 왔다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아내는 나에게 밭에 가서 들깨를 베라고 했다오랜만에 밭으로 갔다풀숲만 자욱하게 우거져 있는 것 같았다들깨는 어디에 있는가자세히 보니 우거진 수풀 속에서 키를 세우기에 애쓰며 서있었다바랭이나 가막사리 같은 큰 풀이 높이 오르니 저도 따라 크려고 기를 썼던 모양이다.

우선 풀을 제치고 들깨를 골라 밑동을 하나하나 베어내고는 풀을 쳐내었다들깨를 벨 일보다 풀을 처치할 일이 더 많다몇 골을 그렇게 하고나니 등판이 땀에 젖었다두어 시간을 씨름하여 베어낸 들깨를 나란히 눕혀놓고 보니 그런대로 제법이 알이 맺힌 것 같았다들깨 밭 옆에 서 있는 율무도 마찬가지다자욱한 풀들 속에 서 있으면서도 알 맺는 것은 잊지 않고 있었다.

아내에게 밭이 왜 이리 묵도록 놔두었느냐 하니 그게 자기 농법이란다맨 땅에 퇴비 같은 거름을 넣어 흙을 좀 걸게 하여 씨를 묻거나 모종을 심어놓고는 그냥 내버려 둔단다화학 비료나 제초제 같은 것은 일절 쓰지 않는단다그러다 보니 밭이 이리 되었다고 한다무슨 그런 농법이 있느냐 하니 방치농법이라 하며 웃는다좋게 말해주어 자연농법이라 할까참 편한 농법이다.

병에 약한 고추에도 아내는 약을 칠 줄 모른다고 했다약 친 고추를 먹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그저 하늘이 병을 안 내리기나 바랄 뿐그래서 고추가 잘 열리면 다행이고병들어 못 먹게 되면 하릴없는 일이라 했다아내의 그 생각대로 어느 해는 풋고추 몇 개 따먹고 난 뒤 고추가 다 말라들어 많은 고춧대를 그냥 뽑아버린 적도 있었다.

전문적인 농사꾼이 될 줄도 모르고소출을 많이 보겠다고 욕심 부릴 일도 없고절로 자라 절로 맺는 열매를 따서 먹으면 그게 좋은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그런데 왜 농사를 지으려 하느냐고 하니 세월을 심심찮게 보내기 위해서란다그러고 보면 아내의 농사란 강태공의 낚시에 조금 닿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내가 아침마다 산책길을 나서고 해거름이면 산길을 걷고 있는 것을 그리 마뜩해 하지 않았다수년을 그렇게 살다보니 이제는 내 삶의 한 부분이 된 것으로 치부하고 있지만한촌을 살기 시작할 무렵에는 나를 두고 별 소득도 없는 일에 힘 빼고 있는 사람이라며 비소도 했었다.그만큼 아내는 현실주의자라고 할까.

이제 보니 아내도 자연주의자라 해도 될 것 같다농사는 사람이 짓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지어주는 것이라는 게 아내의 믿음인 것 같아서다.하늘이 심어주기까지는 할 수 없는 일이니심는 것만 자기가 하고나면 자라는 것은 하늘의 뜻에 맡겨놓고 있는 것 같다그렇게 자라나는 모습들을 즐기면서 열매가 맺히면 거두는 재미도 누리려는 것이 아내의 농법이라면아내도 자연을 따라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반짝이는 윤슬을 품고 맑게 흘러가는 강물이며 길섶을 수놓고 있는 풀꽃들과 마음을 나누며 강둑길을 거닐고새소리 바람소리며 철따라 피고 지는 갖가지 푸나무들과 어울리며 산을 오르는 내 자연살이와 더불어 아내도 나름대로 자연을 살고 있는 것 같다아내와 뜻이 안 맞는 일이 많지만자연주의자로 사는 뜻만은 하나라 할까?

오늘도 아내는 자기의 자연을 따라 밭으로 가고나는 나의 자연을 찾아 산을 오른다이런 한촌살이법들이 바로 아내와 나의 같은 자연살이가 아니고 무엇이랴.(201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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