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도 강둑 산책길을 걷는다. 지금 강둑은 앙증맞게 핀 다홍빛 유홍초의 계절이다. 새깃유홍초도 있지만, 강둑 길섶에 피는 것은 모두 둥근잎유홍초다. 회반죽 길섶에도 풀꽃은 돋았다. 풀숲이 우거져 있는 강둑길에 회반죽이 덮일 때 모든 풀꽃은 끝난 줄 알았다. 모든 것이 낙망이었다. 꽃이 피지 않는 풀이란 없다. 생김새가 다 다르고 빛깔도 가지각색일지언정 풀은 모두 꽃이다. 사람들은 강둑길을 편안히 걷을 수 있게 한다며 그 꽃들을 밀어제치고 회반죽으로 덮어버렸다. 그 날로 풀꽃은 모두 없어졌지만, 길섶에 안쓰럽게나마 흙이 붙어 있었고, 그 길섶이 봄을 맞으며 풀을 솟구쳐내고 꽃을 피워냈다. 그나마 다행이고 위안이었다. 회반죽 길의 절망 속으로 풀꽃 길섶이 작은 희망을 피워냈다. 봄이 짙어지고 계절이 바뀌어가면서 무성해지는 풀숲을 따라 꽃다지, 달맞이꽃, 애기똥풀,박주가리, 무릇, 달개비, 나도송이, 메꽃, 도깨비바늘꽃, 사광이아재비, 벌개미취, 한삼덩굴꽃, 칡꽃……. 무수한 꽃들이 피고 지고, 지고 피었다. 논밭에 애써 가꾸는 것들은 허리가 휘게 돌보아도 잘 건사하기 어려운데 저 신산한 흙을 뚫고 풀들 저리 무성하다니! 그래서 곡식은 사람이 가꾸지만 잡초는 하늘이 가꾸는 거라 했던가. 그 풀꽃들의 한살이는 순탄하지 못했다. 무성할수록 무사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산책길을 나섰을 때, 길섶의 많은 풀들이 허리가 베어지고 발목이 잘린 채 마구 이지러져 있었다. 어느 친절한(?) 이가 저 풀 저리 잘라버렸을까. 회반죽 길이 잘 닦여 있어 발에 걸릴 게 아무것도 없고 걸음을 훼방 놓을 무엇도 없는데, 저리 무참히 해찰을 놓았을까. 사람들에게 저 풀이며 풀꽃들은 눈에 거슬리는 잡풀에 지나지 않았다. 지장을 주든 안 주든 풀들이란 베어내야 할 쓸모없는 것일 뿐이었다.벤 사람은 이 둑길에 풀을 베는 것을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이바지라 생각하며 요란한 예초기 소리와 함께 땀 흘려 베어냈을 것이다. 그 흘린 땀으로 흐뭇한 미소에 젖었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어찌 알까. 알수록 미소가 아니라 비소(誹笑)에 젖을지도 모른다. 저게 뭐라고 안타까워한담? 잡풀 한 포기 없앨 줄도 모르면서, 참 한가한 사람이로군. 그에게는 베어내야 할 잡풀이지만, 나에게는 아끼고 싶은 꽃들임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하물며 그 사람의 논둑 밭둑의 풀꽃들은 그 운명이 어떻게 될까. 봄까치꽃, 꽃다지, 달개비, 다닥냉이, 황새냉이, 개갓냉이, 말냉이, 나도냉이,뽀리뱅이, 한련초, 질경이꽃, 엉겅퀴꽃, 뻐꾹채……. 두렁의 꽃들이란 농군에겐 성가시기 짝이 없는 존재다. 결코 꽃일 수가 없다.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일 뿐이다.돋는 대로 깎아야 하고 자라기 전에 쳐내야한다. 저것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씨가 날려 작물을 헤칠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저걸 그대로 두었다간 게으른 농군이란 소리 듣기 십상이다. 기계를 짊어지고 베어내고 쳐내기도 힘이 든다. 독한 제초제를 뿌리면 힘을 덜 들이고 쉽게 죽일 수 있다. 사람을 죽게도 할 수 있는 약이거늘, 저들이 어찌 죽지 않을까. 사람들은 풀들과 끊임없이 싸운다. 그 사람들의 손으로 무수한 풀들이 죽어간다. 풀꽃들의 목숨이 그야말로 초개(草芥)처럼 사라져간다. 무엇이 저들을 죽어가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가. 누가 못 살게 하는가. 오직 사람일 뿐이다. 사람만이 저들을 못 살게 할 뿐이다. 사람이 바로 풀꽃의 천적인 것이다. 풀꽃은 결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지만 베어낸 자리에 다시 돋는다. 이윽고 잎이 돋고 꽃이 피어난다. 어떤 독약도 그들을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 약 기운이 날아갔다 싶으면 다시 잎을 펼쳐내고 꽃을 피워낸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벨 것이다. 풀꽃은 또 다시 솟구쳐 오른다. 풀꽃의 천적은 사람이지만, 그래서 늘 풀꽃에게 이기는 듯한 싸움을 하고 있지만, 그 천적은 언제나 지고 만다. 솟아난 걸 벨 수는 있어도,다시 솟아나지 못하게는 할 수 없다. 예초기의 칼날 뒤로, 독약의 기운 너머로 풀꽃은 다시 솟고야 만다. 사람은 제 명을 못 이겨 죽어가도 풀꽃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시 살아나고야 만다. 풀꽃을 잠들게 할 수 있는 것은 계절뿐이다. 풀꽃은 계절의 질서 앞에서는 다소곳이 순종한다. 잠들어야 할 계절에는 조용히 잠들고, 피어나야 할 계절에는 생기롭게 피어난다. 풀꽃은 하늘의 목숨이기 때문이다.하늘이 가꾸는 숨결들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목숨과 그 숨결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침 해맑은 강둑 산책길을 걷는다.햇살은 풀숲 위로 고즈넉하게 내려앉아 꽃잎을 다정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사람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온통 잘린 풀대들이며 마른 풀잎이 전쟁터의 주검들처럼 어지럽게 엉겨있다. 꽃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풀꽃들은 묻고 싶다. 사람들이여! 이 주검이 그대들에게 무엇인가. 무슨 영광이 되어 그대들을 미소 짓게 하는가. 나도 묻고 싶다. 마른 풀대며 풀잎 어지럽게 널브러진 길섶이 꽃 숲을 이루고 있는 길보다 더 아늑한가? 더 편안한가?♣(2018.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