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세월의 자국

이청산 2018. 10. 14. 15:25

세월의 자국

 

엊그제만 해도 짙푸른 초원을 이루고 있던 논들이 어느새 황금빛 물결을 이루어 출렁이고 있다숨어 흐르던 개울물이 모여 강물이 되어 흘러가듯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시간들이 모여 세월이라는 강을 이루어 흘러가는 자취가 저 빛깔이 되어 나타난 것 같다.

어찌 저 논들뿐일까앞강의 물빛도 뒷산의 산 빛도 세월의 자취를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자고나면 그 빛깔과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땅의 풀이며 산의 나무들이 꼬물꼬물 싹이 돋고 움이 트는가 싶더니 무성한 푸른빛을 이루다가 흐르는 세월을 따라 색채와 문채를 바꾸어 간다물도 달라지는 풀빛 하늘빛을 따라 빛깔을 바꾸며 세월 속을 흐르고 있다.

나의 세월은 어떤 자취를 남기고 흘러가는가돌아보면 세월은 희로애락을 모두 실은 채 많은 것을 변전시키면서 흘러갔지만그것들은 지금 이 세상의 일이 아닌 것만 같다그 많은 변화의 결과로 오늘 나의 모습이 있다 할지라도한 편의 영화처럼 기억 속에만 살아있을 뿐인 것 같다오히려 지금 좀 아픈 손가락 하나에서 내 세월의 자국을 본다.

어느 날 왼손 약지가 잘 굽혀지지도 않으면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지나가는 아픔이거니 하고 한 이틀을 견뎠지만 그냥 두어서는 안 될 것같이 통증이 우심하여 병원을 찾았다의사는 사진을 찍어 진단해보더니 인대에 염증이 생겼단다다친 적도 없고 심한 일을 한 것도 없는데,왜 이런 증상이 생기느냐고 물으니힘 드는 사용에다가 오래 써서 그런 거란다의사는 주사와 약 처방을 해주고 물리치료를 하라고 했다.

손가락에 조금이라도 힘이 가게 쓴 일이 있었다면 산에 오를 때 스틱을 짚는 일턱걸이할 때 철봉을 당기는 일자전거 운동을 할 때 핸들을 잡는 일 뿐이다의사는 그런 일들로도 손가락에 무리가 갈 수 있다고 했다그것도 힘이 드는 일이라고 오래 하다 보니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말인가그런 운동이 문제라기보다는 나를 거쳐 가는 세월이 남긴 자국이 아닐까 싶다.

물론 손가락만이 아니다팔다리며 몸의 기관들이 한창 때 같지 않다.관절들이 좋지 않고심혈관에도 이상이 없지 않다의사는 적절한 운동을 권했다그래서 내가 선택한 운동이 아침에는 가벼운 기구 운동과 함께 산책을 하고해거름에는 집 뒷산을 오르거나 자전거를 타는 일이다.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런 운동들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다하루라도 운동을 빠뜨리면 오히려 몸에 좀이 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까닭은 또 하나 있다내가 적이 좋아하는 일이 있다마음 맞는 두어 벗과 함께 담소하며 모주(謀酒)에 젖는 일이다살아가는 일 중에서 그런 일만큼 즐거움에 젖게 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을 것 않다그 즐거움을 나와 함께 하는 벗들도 다 그런 상념들을 가지고 있다오죽하면 어느 벗은 자기의 소원이 담소 화락(談笑和樂)에 취생몽사(醉生夢死)라고 했을까.

그 좋은 즐거움을 즐겁게 행하자면 건강이 받쳐주지 않고서는 안 될 일이라는 생각도 하면서 즐기고 있다그 건강을 위하여서도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것이다그렇게 운동을 하는 덕분인지 몸이 그런 대로 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았다운동을 하고 나면 몸도 마음도 개운해져서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을 듯한 자신감을 얻곤 한다.

그 운동의 여파로 탈이 나는 곳이 생기다니여간 거북한 일이 아닐 수 없다별로 무리하지도 않은 그런 운동을 한다고 어디가 탈이 나고 한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운동을 탓할 일만도 아닌 것 같다흘러가는 세월에 왕성했던 기운들이 조금씩 묻어 간 건 아닐까그래서 손가락의 힘도 한창 때보다 못해진 건 아닐까.

사람들은 많은 유행가에서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세월을 두고 왜 무정하고 야속하다고 하는지그 까닭이 이해가 가는 것은 내 속에 세월이 켜가 조금은 두텁게 쌓인 탓인지도 모르겠다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여린 것들을 자라게 하여 왕성한 기운을 주기도 하지만그 기운을 거두어 점점 쇠하게 하다가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흘러가게도 한다. ‘春草年年綠 王孫歸不歸(봄풀은 해마다 푸르련만그대는 가고 돌아올 줄 모르네王維送別)라 하는 노래에는 이런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도 담겨 있을 것 같다.

그렇듯 세월은 갖가지 자국을 남기며 흘러가다가 종내는 사람들을 아주 데려가기도 하지만그러나 세월과 불화하며 살 일은 아니다세월이 사람의 뜻을 따라 흘러가 주지 않을 바에야 세월을 달래가면서 살 수밖에 없다일도 운동도 몸 다치지 않기를 애써 하고모주도 몸이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탐할 일이다그러다 보면 세월도 순하게 흘러가지 않겠는가.

풀이 나고 지기를 거듭하듯달이 차고 기울기를 되풀이하듯사람도 그 자연의 이치 속을 사는 한 존재임에야 갔다가는 다시 올 수도 있지 않을까가지 않고서 어떻게 올 수 있을 것인가세월이 남기는 몸의 생채기는 조금 불편하지만가는 일에 그리 애태울 일은 없을 것 같다그 불편을 잘 다스리면서 세월과 의좋게 살아볼 일이다.

오늘도 아침 운동이며 산책길을 나선다아린 손가락 온전해질 때까지 철봉은 쳐다보기만 해야겠다팔굽혀펴기를 좀 더 하면 되지 않겠는가.산 오를 때 당분간 스틱은 버리고 천천히 오르고 내릴 일이다그러면 시간도 순하게 안겨 오겠지.

아픈 손가락을 다시 보며 순한 세월을 기려 본다하늘을 유유히 흐르고 있는 저 흰 구름도 바라보며-.(2018.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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