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안으러, 나무에 안기려 산을 오른다.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시간과 공간을 모두 넘어선 자리다. 모든 시간들은 나무를 비껴서 흐른다. 모든 공간들도 나무가 선 자리를 떠나 있다. 언제 와도 그 자리의 나무를 볼 수 있어 기쁘다. 위안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던가. 모든 것은 변전을 거듭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변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일 것 같다. 어제의 굳은 마음을,진실한 마음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나무는 변하지 않는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나무는 철 되면 제 철 모습 지어내기를 잊지 않는다. 꽃 피고 잎 돋우고 열매 맺고, 다시 그 모습을 예비하는 일을 끊임없이 해낸다. 나무에게 죽음이란 없다. 언제나 새로 태어날 뿐이다.참으로 비밀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나무 곁에 서서 “나는 아직 윤회의 비밀 곁에 서 있다.”(정일근, ‘나무 한 그루’)라고. 그 비밀을 알아내려면 나무가 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찌하면 나무가 될 수 있을까. 변함없는 모습으로 윤회의 비밀을 이루어가는 나무가 될 수 있을까. 그 시인은 또 말했다. “나무 한 그루 내 곁에 서 있기까지/ 꽃 지고 잎 피어 열매 맺는 순명의 사계가/ 나이테와 나이테 사이에 둥글게 새겨지고/ 또 얼마나 길고 긴 시간 걸어와/ 나무는 서 있는 것일까” 틀린 말이다. 나무가 내 곁에 서있다니? 아니다. 내가 나무 곁에 서 있을 뿐이다. 나무는 설 자리를 찾아다니지 않는다. 난 자리에 그냥 서있을 뿐이다. 길고 긴 시간을 걸어왔는가? 아니다. 묵묵히 서 있었을 뿐이다. 천 년 전에도 서 있었고, 천 년 후에도 서 있을 뿐이다. 그래서 “천 년 전 소나무는 아직도 소나무/ 오늘의 은행나무는 천 년 후에도 은행나무“인 것이다. ‘경이로운 생명의 윤회’를 안고 세월을 넘어 묵연히 서 있을 뿐이다. 시인은 또 말한다. “시의 나무에는 시가 맺힌다” 혹은 “저 나무는 영원을 기록하는 시인의 노래”라고. 시의 나무란 없다. 영원을 기록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나무는 오직 묵묵할 뿐이다. 나무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없다. 그렇기에 나무는 영원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비밀스런 윤회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말이 많아 오히려 말을 잃게 하는 인간 세상과는 달리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천 년의 함묵을 오로지 간직하고 있기에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말을 들려준다. 그 말을 들을 수 있을 때라야 시의 나무도 되고 시인의 노래도 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그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나무의 그 많은 말이 내 안으로 들 때 나무와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또 “나무 곁에 기대어 듣는 나무의 노래/ 내 몸 속에서 흘러나오는 나무의 노래”라 했던가. 그럴 것이다. 나무와 함께 있다가 보면 나무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내 몸속에서도 나무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듯할 것이다. 그런데 왜 ‘나무 곁’에 기대는가. 어찌하여 나무와 바로 살을 맞대지 못하는가. 바로 안기지 않는가. 그것은 나무와 하나 되려는 마음이 아니다. 나무는 그대로 하나의 집이다. 모든 가구가 잘 갖추어진 고즈넉한 주택이다. 기대어도 편하고, 안아도 즐겁고, 그늘에 누우면 더욱 편안하다.그 그늘에 누워 있노라면 새들이 날아와 노래를 불러주고 바람이 달려와 향기를 풀어낸다. 나무는 위안이다. 또 어느 시인은 말했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 어렵고 막막한 시절/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고”(이성복,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1’). 나무는 누구의 위안을 위하여 서있는 것이 아니지만, 넓게 편 가슴처럼 뻗은 가지며 청량한 손길 같은 푸른 잎들이 위안이지 않은가. 팔 벌려 하늘을 맑혀주는 그 모습이 위안이지 않은가. 시인은 이런 말도 했다. “도저히,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 부탁하러 갔을 때/ 그의 잎새는 또 잔잔히 떨리며 웃음 지었다/ -아니 그건 제가 할 일이지요” 이보다 나를 더 잘 보듬는 말이 있을까. 이 말보다 더 그윽한 위안이 있을까. 나무는 자유다. 그 시인은 또 말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그 자신에게조차/ 짐이 되지 않았다/ (나무가 저를 구박하거나/ 제 곁의 다른 나무를 경멸하지 않듯이)”라고. 우리는 남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얼마나 많은 짐이 되고 있는가. 얼마나 숱한 구박과 경멸 속을 살고 있는가. 나무는 아무런 짐 없이 누구를 구박을 하거나 받지도 않는다. 오직 자유로 서있을 뿐이다. 이 또한 얼마나 큰 위안인가. 산을 오른다. 나무를 만나러 오른다. 변하기 전의 내 모습을 보러, 잃어버린 말들을 찾으러 산을 오른다.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무를 안으면 내 맑은 모습을 보여주고, 잃은 말들을 찾아준다. 그리고 나무는 잎새 잔잔히 떨리며‘그건 제가 할 일’이라고 다소곳이 말해준다. 이 순간 어찌 나무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새 나무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의 노래가 나무의 노래인지 나무의 노래가 나의 노래인지, 노래는 마침내 한 덩어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나무는 아무 말이 없다. 사랑도 없고 미움도 없고 죽음도 없고 삶도 없다. 나무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나무는 위안이다. 나무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무를 만나러 산을 오른다. 그 위안에 몸 담그러 오른다.♣(2018.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