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무는 위안이다

이청산 2018. 6. 11. 14:00

나무는 위안이다

-두 편의 '나무' 시와 함께

 

오늘도 산을 오른다나무가 있기 때문이다나무를 안으러나무에 안기려 산을 오른다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시간과 공간을 모두 넘어선 자리다모든 시간들은 나무를 비껴서 흐른다모든 공간들도 나무가 선 자리를 떠나 있다언제 와도 그 자리의 나무를 볼 수 있어 기쁘다위안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던가모든 것은 변전을 거듭한다그 중에서도 가장 잘 변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일 것 같다어제의 굳은 마음을,진실한 마음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나무는 변하지 않는다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나무는 철 되면 제 철 모습 지어내기를 잊지 않는다꽃 피고 잎 돋우고 열매 맺고다시 그 모습을 예비하는 일을 끊임없이 해낸다나무에게 죽음이란 없다언제나 새로 태어날 뿐이다.참으로 비밀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나무 곁에 서서 나는 아직 윤회의 비밀 곁에 서 있다.”(정일근, ‘나무 한 그루’)라고그 비밀을 알아내려면 나무가 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어찌하면 나무가 될 수 있을까변함없는 모습으로 윤회의 비밀을 이루어가는 나무가 될 수 있을까.

그 시인은 또 말했다. “나무 한 그루 내 곁에 서 있기까지꽃 지고 잎 피어 열매 맺는 순명의 사계가나이테와 나이테 사이에 둥글게 새겨지고또 얼마나 길고 긴 시간 걸어와나무는 서 있는 것일까

틀린 말이다나무가 내 곁에 서있다니아니다내가 나무 곁에 서 있을 뿐이다나무는 설 자리를 찾아다니지 않는다난 자리에 그냥 서있을 뿐이다길고 긴 시간을 걸어왔는가아니다묵묵히 서 있었을 뿐이다.

천 년 전에도 서 있었고천 년 후에도 서 있을 뿐이다그래서 천 년 전 소나무는 아직도 소나무오늘의 은행나무는 천 년 후에도 은행나무인 것이다. ‘경이로운 생명의 윤회를 안고 세월을 넘어 묵연히 서 있을 뿐이다.

시인은 또 말한다. “시의 나무에는 시가 맺힌다” 혹은 저 나무는 영원을 기록하는 시인의 노래라고시의 나무란 없다영원을 기록하려 애쓰지도 않는다나무는 오직 묵묵할 뿐이다나무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없다그렇기에 나무는 영원한 것이 아닐까그래서 비밀스런 윤회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말이 많아 오히려 말을 잃게 하는 인간 세상과는 달리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천 년의 함묵을 오로지 간직하고 있기에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말을 들려준다그 말을 들을 수 있을 때라야 시의 나무도 되고 시인의 노래도 되는 것이 아닐까시인은 그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나무의 그 많은 말이 내 안으로 들 때 나무와 하나가 될 수 있다그래서 시인은 또 나무 곁에 기대어 듣는 나무의 노래내 몸 속에서 흘러나오는 나무의 노래라 했던가그럴 것이다나무와 함께 있다가 보면 나무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고내 몸속에서도 나무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듯할 것이다그런데 왜 나무 곁에 기대는가어찌하여 나무와 바로 살을 맞대지 못하는가바로 안기지 않는가그것은 나무와 하나 되려는 마음이 아니다.

나무는 그대로 하나의 집이다모든 가구가 잘 갖추어진 고즈넉한 주택이다기대어도 편하고안아도 즐겁고그늘에 누우면 더욱 편안하다.그 그늘에 누워 있노라면 새들이 날아와 노래를 불러주고 바람이 달려와 향기를 풀어낸다.

나무는 위안이다또 어느 시인은 말했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어렵고 막막한 시절/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고”(이성복,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1’). 나무는 누구의 위안을 위하여 서있는 것이 아니지만넓게 편 가슴처럼 뻗은 가지며 청량한 손길 같은 푸른 잎들이 위안이지 않은가팔 벌려 하늘을 맑혀주는 그 모습이 위안이지 않은가.

시인은 이런 말도 했다. “도저히부탁하기 어려운 일을부탁하러 갔을 때그의 잎새는 또 잔잔히 떨리며 웃음 지었다/ -아니 그건 제가 할 일이지요” 이보다 나를 더 잘 보듬는 말이 있을까이 말보다 더 그윽한 위안이 있을까.

나무는 자유다그 시인은 또 말했다. “그는 누구에게도그 자신에게조차짐이 되지 않았다/ (나무가 저를 구박하거나제 곁의 다른 나무를 경멸하지 않듯이)”라고우리는 남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얼마나 많은 짐이 되고 있는가얼마나 숱한 구박과 경멸 속을 살고 있는가나무는 아무런 짐 없이 누구를 구박을 하거나 받지도 않는다오직 자유로 서있을 뿐이다이 또한 얼마나 큰 위안인가.

산을 오른다나무를 만나러 오른다변하기 전의 내 모습을 보러잃어버린 말들을 찾으러 산을 오른다.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나무를 안으면 내 맑은 모습을 보여주고잃은 말들을 찾아준다그리고 나무는 잎새 잔잔히 떨리며그건 제가 할 일이라고 다소곳이 말해준다이 순간 어찌 나무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새 나무의 노래가 흘러나온다나의 노래가 흘러나온다나의 노래가 나무의 노래인지 나무의 노래가 나의 노래인지노래는 마침내 한 덩어리가 되고 만다그러나 나무는 아무 말이 없다사랑도 없고 미움도 없고 죽음도 없고 삶도 없다나무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그래서 나무는 위안이다나무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무를 만나러 산을 오른다그 위안에 몸 담그러 오른다.(20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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