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봉평의 메밀꽃

이청산 2018. 6. 23. 12:26

봉평의 메밀꽃

 

대지에 초록이 짙어져가는 유월 중순평창 봉평의 메밀밭은 붉은 흙을 드러내면서 텅 비어 있었지만 그 꽃은 봉평 어딜 가도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으로 찬연하고 황홀하게 피어 있었다.

석 달마다 한 번씩 하는 지역 문화 답사 모임을 이번에는 강원도 평창으로 행로를 정했다이른 아침 길을 돋우어 세 시간 가까이 달려 진부에 닿아아침나절에 조선 선조 때 왕조실록이며 왕실족보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를 보고신라 선덕여왕 때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월정사(月精寺)를 거쳐 봉평에 이른 것은 점심나절이었다.

봉평 들머리서부터 푸나무며 집들이 모두 메밀꽃으로 피어있는 것 같았다점심을 예약해둔 식당을 찾아가는데거의 모든 식당들이 메밀 음식을 주메뉴로 걸고 있었고 간판도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인물이나 장소를 내건 것 아니면 바로 메밀을 내걸었다.

우리가 찾아간 물레방아식당도 작품 속의 배경 공간을 간판으로 삼은 것은 물론이다메밀묵전골메밀만두메밀전 그리고 주인의 넉넉한 인심이 함께 차려진 상에 메밀 막걸리를 곁들인 점심을 맛있게 먹고식당에서 파는 메밀가루를 사들고 이효석을 찾아 나섰다온 봉평이 메밀꽃이듯 이효석은 봉평의 모든 곳에 있었다.

이효석은 1907223일 바로 이 마을 봉평 창동리에서 태어났다는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효석문학관을 찾아간다서가(書架형상을 하고 있는 문을 지나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제호 비가 누워있는 문학관 초입에 들어서니, 1980년 영동고속도로변에 세운 것을 2002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可山李孝石文學碑』가 황금찬 시인이 쓴 비문을 안고 서있다.

예술가는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안에 영원히 살아있다는 비문 구절을 뜻 깊게 새기며 비탈길을 올라 봉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선다구불구불 산책로를 안고 있는 수천 평은 됨직한 붉은 밭이 내려다보인다아직은 철이 아니라 빈 밭으로 있지만 가을이면 그야말로 소금을 뿌려놓은 듯 하얀 메밀꽃 밭이 어우러진다고 한다그 주위로는 울멍줄멍 메밀 음식점들이 모여 있다메밀은 없어도 메밀 맛은 한껏 흐드러지고 있는 듯했다.

문학관 건너편 찻집의 벽에 이만진이라는 분이 메밀꽃 필 무렵」 전문을 한 자 한 자 목판에 필사해놓았다그 작품이 얼마나 감동적이었으면 그런 지성을 들일 수 있었을까문학관 안으로 드니 먼저 영상실로 안내했다영상은 이효석의 생애와 문학을 출생과 학창시절동반자 작가와 구인회 활동탐미주의자로 모더니스트로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문학세계결혼생활경성과 평양에서의 삶결핵성 뇌막염으로 1942525일 36세를 일기로 짧은 생애를 마감했던 만년으로 엮어 보여주었다.

전시장에서는 영상이 보여준 여러 가지 자료들을 실물로 전시해놓았다재현한 집필실 정경과 함께 유품이며 학창 때의 성적표 등 생애의 흔적과 이효석이 작품을 발표했거나 그의 작품이 실린 희귀본 자료들을 전시하여 생애와 문학을 실물 자료로 알고 느낄 수 있도록 해놓았다봉평장 광경을 비롯한 메밀꽃 필 무렵의 주요 장면들을 소품으로 만들어 놓아 작품 속의 장면들을 더욱 생생하게 새겨볼 수 있도록 했다전시장 한쪽에 메밀 자료실을 따로 만들어 메밀의 생태와 이용에 대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작품에서 메밀이 얼마나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으면 그렇게 하였을까문학관이 온통 메밀꽃으로 차 있는 듯했다.

문학관을 나서 생가를 찾아간다조그만 다리를 건너 오솔길을 따라 가다가 수많은 책이 꽂혀있는 서가 모양의 효석달빛언덕’ 문을 든다.당나귀 모형이 길손을 맞는 길을 따라 들어가니 이효석이 나고 자란 곳이라는 생가가 나온다옛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것이라 하지만부엌과 방 세 칸의 일자형 초가집에는 이효석의 꿈과 향수가 아련히 담겨있는 것 같다.

생가를 나오니 이효석이 활동했던 근대의 시간과 공간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는 근대문학체험관이며 이효석이 평양에서 거주했다는 푸른집을 재현한 곳이 눈길을 잡는다커다란 당나귀 모양의 전망대를 지나는데 길바닥에 이효석의 작품 제목들을 동판에 새겨 박아 놓았다이 너른 들판을 이효석을 위해 온전히 다 바치고 있다.

들판만이 아니라 봉평은 또 산자락 하나를 이효석에게 고스란히 바친다창동리 흥정산 어귀를 오르니 양쪽에 서있는 연필 모양의 두 원기둥과 함께 이효석 문학의 숲’ 현판을 단 너와지붕 출입문이 나타난다나귀를 몰고 있는 동이와 담소하고 있는 허 생원과 조 선달이 먼저 길손을 맞는다문학관 들머리처럼 메밀꽃 필 무렵』 제호 빗돌이 누워있는데길 따라 오르니 잘 다듬어진 수많은 화강암 바윗돌에 메밀꽃 필 무렵」 구절들을 하나도 놓침 없이 새겨놓고 간간히 장면들을 실경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다온 산이 온통 메밀꽃’ 숲이다.

『李孝石文學의 숲이라는 빗돌을 지나니 너와집 정자와 함께 허 생원조 선달의 방이 나오고 방문객의 감상과 소망을 적어 부적처럼 붙여놓은 작은 집도 보인다작품의 구절들을 새겨놓은 바윗돌을 잇달아 지나며 내처 오르니동이가 주모에게 술잔을 받고 있는 충주집이 나온다붉은 얼굴을 쳐들고 계집과 농탕치는 동이를 보고 허 생원이 발끈했다던가시기심이었을까뭔가 당기는 게 있었을까.

다시 글 새긴 돌 따라 오르노라니 드디어 허 생원이 성 처녀와 인연을 얽은 물레방앗간이 나타난다방앗간 앞의 돌에는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달이 너무나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이상한 일도 많지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고방앗간 안에서는 허 생원이 겁먹고 있는 성 처녀에게로 다가가고 있다허 생원 평생을 두고 가슴에 남게 되는 성 처녀다소설의 가장 절정 장면이다세월이 흘러 성 처녀는 어딜 가서 애비 없는 자식을 두었다던가.

달밤에 세 장돌뱅이가 함께 물을 건너다가 허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뎌 고꾸라지는 장면이 보인다소설 속의 동이는 허 생원을 얼른 들쳐 업는데허 생원은 동이의 탐탁한 등어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게 느껴지더라고 했다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나귀가 걷기 시작했을 때 보니 동이의 채찍이 허 생원처럼 왼손에 있었고달은 기울어져 가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글이 새겨진 돌을 마지막 장면까지 더듬다가 산을 내려온다소설도 그랬지만 이 돌들도 그 이상의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는다감춘 이야기 속에 아련한 감동이 숨어 있음을 숲속의 새들도 느꺼워하는 양 지저귀는 소리가 한결 정겹다봉평은 모든 땅들을 이효석에게 바치고 있다그리고 해의 사시사철만이 아니라 쉼 없는 세월을 두고 숨 막힐 듯 희고 찬연한 메밀꽃을 피워내고 있다.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이 말은 영국의 평론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이 영국은 언젠가 인도를 잃을 테지만셰익스피어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함께하리라.”라고 한 말이 잘못 알려진 것이라 한다물질적인 가치는 덧없을 수 있지만정신적인 가치는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는 말일 것 같다.

이효석도 세상의 물정이야 어찌 돌아가든 그 문학의 세계와 예술의 향기는 영원한 가치가 되어 남을 것이다그 가치를 위하여 온 봉평을 이효석에게 다 바친들 무엇이 아까울까이효석의 가치가 곧 봉평의 가치로 남을 것이 아닌가이효석이 있는 한 봉평의 메밀꽃은 언제나숨이 막힐 지경으로 피어날 것이다.

봉평의 메밀꽃을 진득이 새기며 오늘의 마지막 여정으로 율곡 이이와 화서 이항로의 위패를 모신 봉산서재(蓬山書齋)로 향한다봉평의 또 다른 가치가 우리를 기다리리라 여기면서도 메밀꽃 찬연한 봉평이 다시 돌아보인다문학작품 한 편이 온 산야를 꽃으로 물들게 한 그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사람 사는 일의 가치는 어디에 무엇에 있는 것일까.

오늘 봉평의 메밀꽃은 우리에게나에게 무엇으로 남을까차는 계속 여정을 달려가고 있다.(2018.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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