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풀꽃 산책길을 그리며

이청산 2018. 5. 9. 13:38

풀꽃 산책길을 그리며

 

육중한 굴삭기가 지나가고회반죽이 두껍게 덮이면서 강둑은 불모의 메마른 길폐허의 거친 땅으로 변해버렸다.

그 길은 발자국 길이었다사람들이 거니는 발자국을 따라 가르마를 타듯 나 있는 길의 양쪽 길섶으로는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강 쪽으로는 벚나무가 줄지어 서있어 해마다 봄이 되면 해사한 꽃 천지를 이룬다그 벚나무는 여전히 서 있지만수풀은 사라졌다.

그 수풀에는 봄 들어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피고 지는 풀꽃들이 끊이지 않았다철철이 모양도 다르고 빛깔도 달랐다대궁에서줄기에서,덩굴에서들 꽃을 피워냈다아기 손톱보다 더 작은 꽃들도 있는가 하면,아기 주먹만 하게 큰 꽃도 있었다노란 꽃하얀 꽃붉은 꽃푸른 꽃들이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면서 철을 누비며 강둑을 수놓았다.

나는 아침마다 그 길을 걸었다꽃들은 아침마다 해맑은 미소를 건네 왔다싱긋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지만악수하듯 서로 보듬는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다이들을 만나면 반가운 인사말 말고는 가슴속에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그 꽃들처럼 맑고 고운 생각으로 가득 찼다꽃이 하얀빛이면 하얀 생각주홍빛이면 주홍 생각…….

때로는 성가시기도 했다도깨비바늘 녀석은 나를 후벼 팔 듯이 찔러댄다떼어내도 떨어질 줄 모른다환삼덩굴 녀석은 슬며시 옷깃을 잡다가 저를 떨칠라치면 사정없이 꽃가루를 뿌려댄다칡넝쿨은 아예 길을 막고 발을 감아버린다자르거나 걷어낼 수밖에 없다옆의 것을 칭칭 감아 목을 죄고 있는 걸 보면 두고 볼 수 없을 만큼 밉살스럽다그런 것들이 그리움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발걸음을 훼방 놓는 것이 못 마땅하기도 했지만이슬이 바짓가랑이를 젖게 하는 것이며비라도 내리면 길이 질척해지는 것도 마뜩찮게 여겼다차나 경운기가 쉽게 다닐 수 없는 것도 불편하다며요즘 세상에 이런 길이 어디 있느냐고들 불평했다관에다가 번듯한 길을 닦아달라고 진정했다.

어느 날 커다란 굴삭기가 들어와 수풀을 모두 걷어냈다흙바탕을 만들어 다지고는 격자 철망을 깔아가면서 회반죽을 들이부었다며칠 뒤에는 번듯한(?) 길이 되었다세상의 무엇도 깃들 수 없는 메마르고도 경결한 길이 되고 말았다그 많던 꽃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무엇을 바라며무엇과 마음을 나누며 이 길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길섶은 폭격을 맞은 듯 폐허 세상이 되어버렸다뽑혀나간 나무들의 뿌리는 전쟁터에 나뒹구는 주검 같았다다시 굴삭기가 오더니 나무 형해를 걷어내면서 흙을 거칠게 그러모아 길섶에 붙였다흙이며 돌들은 한데 짓이겨지면서 회반죽 길 옆구리에 구차스러운 자리를 얻어 나갔다.

아침 강둑길을 걷는다강물은 어제처럼 청랑하게 흘러가는데길은 어제의 길이 아니다딱딱하고 하얀 길을 걷는 발걸음에서 쇳소리가 나는 것 같다길섶의 검붉은 흙이며 생채기처럼 박혀 있는 크고 작은 돌들을 보노라니 쓸쓸하고도 답답하다노랗고하얗고 붉은 풀꽃 시절이 그립다성가시게 달라붙던 도깨비바늘도 그립고슬쩍 옷깃을 당기던 환삼덩굴도 다시 보고 싶다이 강둑의 지난 모든 풀들이 아리게 사무친다.

이튿날 작은 괭이 하나를 들고 나섰다회반죽 길이야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지만이 구차한 길섶에서나마 풀꽃을 다시 보고 싶다길섶에 박혀 있는 돌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잔 것들까지 다 치울 수는 없지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돌을 추려내려 애썼다풀이 날 자리를 위해서다내가 돌을 하나 들어낼 때마다 한 포기의 풀꽃이 더 솟을 거라 생각하면 하나라도 더 들어내고 싶은 마음이 도저해져 간다.

나의 일은 며칠 아침을 두고 계속 되었다그렇게 할 때마다 땀이 온몸을 적셨다그 땀이 풀꽃들의 생명수가 되기를 바랐다웬만한 것들은 거의 들어내었다 싶었는데이런 변이 있는가회반죽 길 끝의 조금 남은 흙길 한 자락에 누가 자잘한 공사 폐기물을 마구 쏟아놓았다저것들에 눌려있는 풀 자리는 어쩌란 말인가야속하고도 야멸차다.

다음 날 삽을 가지고 나섰다그 폐기물들을 둑 아래로 끌어내렸다한참을 끌어내리니 흙이 드러났다몸에는 흙빛보다 짙은 땀이 흘렀다끌어내리는 것으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근처에 자욱이 피어 있는 애기똥풀 꽃 한 포기를 폐기물이 치워진 길섶 한 중간에 옮겨 심었다버린 사람이 와서 보기를 바랐다뭔가를 느낄 수 있을까.

이튿날 가서 보니 꽃이 시들고 있었다잘 피고 있는 꽃을 괜히 옮겨 이 고생을 시키는가 싶어 민연했다비닐봉지를 주워 도랑물을 담아다가 부어 주었다그 다음날 보니 생기를 차려가고 있었다이 꽃이 퍼져 온 강둑이 꽃 천지가 되기를 조용히 빌었다내가 돌을 골라낸 강둑 길섶에도 풀숲이 우거지기를온갖 풀꽃들로 수놓인 강둑이 되기를 간절히 빌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나를 보고 물색없는 감상주의자라며 웃어도 도리 없는 일이다나는 길섶의 풀꽃을 보고 싶다편편히 잘 다져진 길의 편리보다도 내게는 우거진 수풀 속의 풀꽃 한 송이가 더 그립다그것들이 내 바짓가랑이를 어떻게 적실지라도때로는 며느리밑씻개 꽃 가시에 손가락이 찔릴지라도 나는 그들을 보듬고 싶다.

내 어리석은 감상주의가 그들에게 아리따운 꽃을 피우게 할 수 있다면나는 그들 속에서 소곳한 감상주의자가 되고 싶다풀꽃 산책길을 그리며-.(20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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